읽고본느낌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샌. 2023. 10. 13. 11:13

장석주 작가의 글은 가을과 잘 어울린다. 그중에서도 늦가을 저녁의 분위기가 진하다. 쓸쓸하지만 석양의 기운이 따스하다. 이 계절에 읽기에 적당하다. 작가의 산문집인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에는 그런 느낌의 글이 가득하다. 음미하며 조금씩  읽었다. 책에 실린 글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일요일의 문장'에 연재한 것이다.

 

책 표지에서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시인.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 서재와 정원 그리고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며 햇빛과 의자를, 대숲과 바람을, 고전과 음악을, 침묵과 고요를 사랑한다."

 

작가의 글에는 안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작가는 안성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추알처럼 잘 익어가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것을 앗아가고 부서뜨리는 시간의 덧없음을 바라보며 작가는 가만히 웃는다.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라는 이 책의 제목이 잘 지어졌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의 맛에 대하여'라는 글의 한 부분이다.

 

인생의 맛, 인생이 뭔지도 모르고 인생을 살았다. 봄가을을 예순 번씩 넘기고 살아보니 그나마 어렴풋이 인생의 윤곽을 그려볼 수가 있게 되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은 뒤돌아볼 때 이해가 되는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사람은 앞을 보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나는 진심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꿈을 꾼 적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현실 조건에 눌리지 않고 애써 잘 살아내려고 했건만 크게 이룬 것도 없고, 남의 손가락질을 받을 큰 과오도 없었다. 마흔 넘어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에 집 짓고 내려와 침묵의 신봉자가 되어 간 것은 잘한 일이다. 해마나 봄철에 열리는 나무시장에 나가 여러 나무들을 사다 심은 것, 모란과 작약이 꽃피기를 기다리던 것, 초겨울 밤하늘에서 쏜살같이 흘러가는 유성우들을 바라본 것은 잘한 일이다. 인생이 배움이 연속이라는 깨달음은 삼엄해서 부지런히 책을 구해다 읽었다. 작은 깨우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살뜰하게 행동으로 옮기며 살지는 못했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며 살았다. 그저 밥 굶지 않고 살며 책 몇 권을 썼다. 그런 내게 인생이란 신성하지 않고 그렇다고 아주 느른하지도 않았다.

"어때요? 살 만했나요?"
누군가 인생의 맛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테다. 혼자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겠지. 인생이란 아주 씁쓸한 것만도, 그렇다고 달콤한 것만도 아니었지만,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생의 맛이 고작 어제 남긴 식어버린 카레를 무심히 떠서 먹는 맛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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