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낭만아파트

샌. 2012. 4. 9. 12:32

우리나라 근현대 문화사를 말할 때 아파트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을 '아파트 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아파트는우리의생활 양식과 의식을 지배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전체 세대의 반 이상이 이미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파트가 좁은 땅에서 주거 문화를 개선하는데 효과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국에서 아파트는 투기와 욕망, 물신숭배의 상징이 되고 있다. 어떤 소설가는 아파트를 '사람 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넷'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파트가 주는 편리함과 안락을 무시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한국에서아파트는 돈이 된다는 데 있다. 또한 아파트 위치와 평수는 특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아파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개발 시대의 효용이 다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아파트의 매력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가정주부들한테 열렬히 환영을 받았던 아파트의 장점은 아직도 유효하다. 또한, 아파트라는 밀집형 주거 형태가 아니라면 주택지로 엄청난 토지가 새로 필요할 것이다. 내가사는 아파트만 해도 고작 집 한 채가 들어설 자리에 무려 80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만약 입주민 모두가 마당 가진 집을 원한다면 지금보다 80배나 더 넓은 땅이 필요할 것이다. 인구가 대폭 줄지 않는 한 아파트는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탈석유시대가 도래한다면 가장 먼저 아파트가 타격을 받을 건 확실하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도시 문명 전체가 몰락할 것이다. 도시 주변의 대형 전원주택도 마찬가지다. 전기에너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과소비를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삶의 양식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가 오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냐인 것만 문제일 뿐이다.

방에 누워 있으면 묘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바로 위에도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도, 또 그 위에도.... 층층이 쌓여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무척 기이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조용한 밤이면 윗집의 생활 소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윗집에 사는 사람의동선은 어떻고,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그리고몇 시에 잠드는지 나에게 고스란히 노출된다. 그럴 때는 아파트가 결코 사람 사는 집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의 앞날을 어둡게 보는 분의 책을 읽었다. 허의도라는 분이 쓴 <낭만아파트>라는 책이다. 제목이역설적이다. 그중에서 60년 뒤의 몰락한 아파트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예견한 글이 재미있어 여기에 옮긴다. 이 책이 출판된 건 2008년인데, 지은이가 김정일 사망을 2013년으로,남북의 연방제 통일을 2015년으로 예상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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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3년 서울, 옛 조선의 4대문 바깥, 서대문 인근의 아파트 3개동 철거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문화재위원회와 시민단체는 보존을, 아파트 주민은 개발을 위한 철거를 주장하면서 논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서울은 이미 예전의 영광을 구가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2013년에 정부 행정기능의 대부분을 충청권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편법을 동원해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일이 벌어졌다. 기업과 금융기관의 본사 또한 서울과 행정도시에서 이중살림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서울은 다시 엉망진창의 도시로 퇴색해갔다. 예전의 서울이 아니었다. 2030년대 중반 들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서울을 떠나기 시작했다.

서울의 인구는 이제 230만 명. 창업주 이후 4, 5세로 상속하며 이어져 온 재벌기업은 해체의 길로 접어든 모습이 역력했다. 이렇게 저절로 몸집이 가벼워질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벌을 공격하고 또 재벌은 방어를 위해 애썼던가? 기업의 본사는 대개 공장이 있는 도시로 다 옮겨갔다. 금융회사 본사도 행정수도와 그 인근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의 화려함을 상징하던 강남 테헤란로의 불은 완전히 꺼졌다. 간혹 성남과 용인 일대로 이동하는 차량 불빛만 스쳐지나갈 뿐, 예전의 금융 중심의 서비스산업 생산기지로서 위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2053년 처음으로 완전히 빈 빌딩 하나가 생긴 이래 테헤란로를 따라 불야성을 이루던 사무공간은 서서히 침몰해갔다.

그 여파로 강남의 아파트 또한 하나둘 비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완전한 슬럼가로 전락했다. 그곳은 외국인 노동자와 노숙자의 천국으로 각광을 받았다. 급기야 정부는 2067년부터 아파트 전면 해체작업에 들어갔고, 2073년에 마지막 아파트 3개동을 남겨둔 상태였다.

문화재 애호가들은 최근 120년 이상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콘크리트 상자 같은 건축물은 세계적으로도 희소한 만큼 남은 몇 개를 꼭 보존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들은 이어 우리 건축사에서 1900년대 것은 완전히 사라졌고 2000년대 것 역시 그럴 운명에 처해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어떤 것은 일제 잔재라는 비난에 부닥치고 어떤 것은 낡아 위험하다는 지적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 결과 여전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신라의 절과 조선의 궁궐뿐이었다. 상당수 문화재 관련 시민단체는 그 반문명적 아파트를 남겨 다시는 그런 환경불화형 집이 들어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거리행진을 계속했다.

사실 주택의 소재는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 주로 사용하던 철근과 콘크리트, 벽돌은 사라지고 대신 가볍고 견고한 큐블리라는 신소재가 일대 유행이었다. 큐블리는 콘크리트 수준의 강도를 지녔고, 마치 호흡을 하듯 공기를 들여보내고 내보내는 성질을 갖고 있어 바이오 소재로 불리며 각광을 받았다. 카본수지 복합재인 큐블리는 원래 항공기에 사용되다가 개인주택과 공공주택 소재로까지 사용되게 되었다. 일본의 섬유화학 기업인 도레와 테이진이 경쟁적으로 개발하여 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을 벌이자, 우리 기업들고 미래 유망 산업으로 보고 국산화에 열을 올렸다.

정부는 행정중심도시다, 혁신도시다 하며 서울 경량화 조치를 취했으나 그것은 엉망이 됐다. 이를 수행하는 공무원, 공기업 직원 등이 교묘하게 이를 악용해서 서울에 그대로 머물기를 시도하는 바람에 각 조직은 이중살림을 하게 됐다. 게다가 아파트 난개발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서울은 황폐화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저명 건축가 김석철은 "일단 아파트가 들어서고 난 곳은 영원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아파트를 세우는 난개발은 절대 막아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 '소귀에 경 읽기' 수준에 그쳤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는 진화를 거듭했지만, 도시 문제의 근원을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파트란 게 본래 여러 감시체제를 강화하고 외곽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 아닌가? 결국 아파트 단지는 도시의 고도로 변해갔다. 경비원과 관리원 수를 줄이면서 디지털 개폐장치가 그들을 대신했다. 그나마 그들이 있어 사람 사는 것 같았던 아파트 단지는 삭막해졌다.

20세가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초호화 아파트 단지는 일반 아파트 단지가 갖춘 시설에 헬스클럽, 수영장, 골프연습장 등을 추가하면서 거주자의 승인 없이는 출입이 불가능한 안전공간으로 변했다. 군사 독재 시절 일반인들에게는 은밀함으로 다가섰던 안가가 상류층 모두에게 일상화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디지털 출입시스템과 CCTV 등을 동원한 자동화관리시스템 덕분에 가능했다. 이것은 재개발 바람과 아파트 고급화를 더 부채질했다. 여기에 분양 원가 자유화 바람이 더해져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제는 아파트로 돈을 번 사람에게조차 지겨운 악순환이었다.

2013년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세계에 타전됐다. 금방 무너질 것이라고 했던 전문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북한은 군부 집단지도체제로 급선회하면서 별 탈 없이 버텼다. 2015년 남한의 진보성향 집권당과 북한 군부 소장파의 오랜 협상 끝에 남북한 2개 연방국가로 사실상의 통일을 이뤘다. 그러나 2027년 북한에서 대규모 군부 반란이 발생애 한반도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진압 과정에 미국과 중국이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평화체제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통일을 이루겠다는 국가적 사명감을 상실하게 되었다. 북한은 다급하게 중국과 미국의 공동지배체제로 전환해 붕괴를 막았다. 그 즈음 남한엔 반군세력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극단적 양극화가 몰고 온 후유증으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나라는 벼랑으로 치달았다. 가진 자들의 해외 이탈이 이어지면서 생산기지는 무너져내렸다. 2048년 건국 100주년 축하 행사장은 반군의 공격으로 피바다를 이뤘다. 서울의 그 화려하던 고층 빌딩은 비어 공포의 공간이 되거나 무너져내렸다. 스카이라인은 주저앉았고, 나라는 질서와 치안 부재 상태에 빠져들었다. 대통령은 지난 100년의 기적적 영광을 내세우며 재결속을 호소했지만 공염불이었다.

이런 와중에 마지막 아파트 보존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아파트는 한국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연출된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산물 아니었던가? 현대성의 상징이라는 주장도 여러 사학자에 의해 제기됐다. 이와 함께 2000년 전후에 유행했다가 잊혀진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닉네임이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학자들은 시골 산과 들의 경관을 망치면서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아파트를 지어야 분양되는 기현상, 도시미(都市美)에 대한 판단력과 실천력 상실, 돌과 나무 그리고 콘크리트와 같은 소재의 장단점 비교, 외형의 단순함 혹은 화려함의 문제를 떠나 역사와 주민의 생활양식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관점에서 본 아파트의 실패, 도시의 파편화를 초래한 획일화한 아파트 주거문화 등과 같은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거론하면서 한국의 아파트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파란 눈의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말한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를 들고 나왔다. 이들은 외부인에 철저히 문을 걸어 잠근 아파트가 결국엔 바깥 세계와 격리됨으로써 그 존립 기반을 잃게 됐다고 지적했다.

애초 인간성 상실을 감수하면서 관리 유지의 단순화와 편안함을 추구하던 아파트가 오히려 관리 유지를 더 뒤엉키게 만들 줄이야! '복잡하면 망한다'는 복잡계 문명 몰락론이 아파트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얼핏 견고하게 일어선 것 같은 아파트 중심의 도시 문화는 실상 깊은 취약성을 드러냈고, 쇠락의 조짐을 보였다. 그리고 아파트를 문화재로 지정해 후대에까지 보존해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누가 상상했겠는가! 아파트가 경복궁 근정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재로 떠오를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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