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몸에 밴 어린 시절

샌. 2012. 5. 9. 10:19

우리는 모두가 한때 어린이였다. 어린 시절은 지나갔으나 그때의 흔적은 지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살아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내재과거아(內在過去兒, Inner child of the past)'란 개념이다. 내재과거아란 어른이 된 지금도 우리의 삶 안에 그대로 남아서 지속되고 있는, 우리가 과거에 겪어온 어린이의 모습이다.

이 책을 쓴 미실다인(W. H. Missildine)은 정신과 의사로 어린이 정신 건강 센터의 책임자로 일하다가 성인의 정신적인 문제에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어릴 때 가정에서 부모와의 온전하지 못한 관계 때문에 어른이 되어 외로움, 불안, 성적 장애, 우울증, 부부 사이의 불화, 성공을 향한 충동적인 집착 등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런 내재과거아는 친구나 동료, 배우자, 자녀와의 관계를 지배한다. 그리고 피로감, 안절부절못하는 태도, 머리를 싸매는 두통, 위장 장애 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은이는 내재과거아라는 개념을 통해 성인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 방법을 찾는다. 프로이드식 정신 요법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정서 장애의 문제를 내재과거아로 치료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여러 임상 사례가 실려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겪은 경험들이 지금 우리를 이루고 있고, 그때에 길러진 감정과 태도를 지닌 채 살아간다.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책은 강조한다. 내재과거아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 부모가 일상적으로 음식, 가정생활, 종교, 교육, 성, 금전 등을 대하던 문화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특별히 자기를 대하던 태도까지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지난날 가정의 분위기와 우리를 대하던 우리 부모들의 태도를, 설령 그것이 해악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그대로 재현하려는 지속적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실제 네 사람이 결혼하는 것과 같다. 결혼하는 두 사람과 그들 안에 있는 두 내재과거아다. 그래서 결혼이란 복잡한 것이고 내재과거아의 방해가 결혼생활이 피곤해지는 제일 큰 원인이다. 결혼하는 사람은 상대방 속에 들어 있는 내재과거아와 당장 마주쳐야 한다.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상대의 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지은이는 결혼하기 전에 상대의 집을 방문하여 부모와의 관계를 잘 살펴보라고 조언한다. 상대가 자기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곧 자기를 대하는 태도라고 보면 된다. 상당히 현실적인 충고다. 결국 결혼생활의 만족과 성공은 네 사람이 저마나 어떻게 나머지 세 사람을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잘 적응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지은이는 우리 부모의 지나치고 병적인 태도들에서 기인한 내재과거아의 문제점을 아홉 가지로 분류했다.

1. 완벽주의: 물질적, 지적, 사회적 성취를 향한 한없고 고집스런 몰입
2. 강압: 빈둥거리거나 늑장 부리기. 공상, 갖가지 반항 행위들
3. 유약: 충동적인 행위, 발끈하는 기질,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
4. 방임: 권태감, 끈기 부족,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능력의 결여
5. 심기증: 건강에 대한 공포
6. 응징: 보복하고자 하는 강한 원의
7. 방치: 불안, 고독, 다른 사람에게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태도
8. 거부: 자신이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태도
9. 성적 자극: 성의 인격적인 측면은 무시하고 육체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태도

이런 문제점을 해소해서 내재과거아와 원만하게 지내도록 하는 게 지은이의 목표다. 그러자면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내재과거아를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책은 이런 병적 특징을 한 장씩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어떤 정신적, 심리적으로 문제를 겪는 사람에게 일정 부분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기질과 성향을 모두 내재과거아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지은이의 설명에 어색한 부분도 여러 군데 눈에 띈다. 다만 이 책이 어린 시절이 인격 형성에 중요한 시기라는 점을 밝힌 점은 소중하다. 다른 어떤 이론보다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한 부모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미숙한 부모가 많다. 내 경우를 돌아보아도 그렇다. 고쳐지지 못하는 '습(習)'은 세대를 이어 전해진다. 마치 시지포스의 신화처럼,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알고 긍정하는 것은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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