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숙과 골개숙은 둘이서
명백의 언덕과 곤륜의 빈 터를 관람했다.
이곳은 황제가 머물던 곳이다.
갑자기 골개숙의 왼쪽 팔꿈치에 버드나무가 생겼다.
그의 마음은 놀라 싫어하는 눈치였다.
지리숙이 말했다.
"자네는 그것이 언짢은가?"
골개숙이 말했다.
"아니네. 내 어찌 싫어하겠나?
생명은 임시로 빌린 것이야.
또 빌린 몸을 다시 빌려 생겨난 것은 티끌이야.
삶과 죽음은 낮과 밤이고
나와 그대는 그 조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그 조화가 나에게 미친 것인데
내 어찌 싫어한단 말인가?"
支離叔與滑介叔
觀於冥伯之丘 崑崙之虛
黃帝之所休
俄而柳生其左주
其意蹶蹶然惡之
支離叔曰
子惡之乎
滑介叔曰
亡予何惡
生者假借也
假之而生生者塵垢也
死生爲晝夜
且吾與子觀化
而化及我
我又何惡焉
- 至樂 3
장자에서는 자연의 변화에 대한 절대 긍정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골개숙의 팔에 버드나무가 생겨났다.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버드나무라고 번역된 것은 버드나무처럼 생긴 기형의 혹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아마 바깥 나들이를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골개숙은 이내 그런 변화를 받아들인다. "자연의 조화가 나에게 미친 것인데, 내 어찌 싫어한단 말인가?"
좋다, 싫다는 어느 하나에 집착하는 인간의 감정일 뿐이다. 나를 넘어서서 생사마저 초월한 사람에게 받아들이지 못할 변화는 없다. 이런 태도는 자연이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선이나 악이 있는가.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부를 뿐이다. 눈 앞의 희비에만 휘둘려서는 부평초 같은 삶이 될 수밖에 없다.
바울은 테살로니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라고 썼다.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은 나에게 찾아오는 '모든' 일이다. 바울의 당부와 골개숙의 태도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늘의 섭리에 대한 절대 긍정의 태도다. 그러나 감사하고 싶다고 해서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건 아니다. 마음속에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그래서 늘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모든 일에서 감사할 수는 없다. 하늘에 자신을 복속시킨 사람만이, 그래서 소아(小我)가 사라지고 '빈 터'와 같이 된 사람만이 참다운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우주와 한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