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장자[112]

샌. 2010. 3. 31. 08:30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교사(郊祀)에 날아들었다.

노나라 제후는 그 새를 맞아들여

묘당에서 잔치를 베풀고 술을 올렸으며

순임금의 음악인 구소를 연주하여 즐겁게 했고

소, 염소, 돼지로 반찬을 만들어주었다.

새는 드디어 눈이 어질어질하고 근심과 슬픔에 젖어

고기 한 조각도 먹지 않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다가

사흘 만에 죽어버렸다.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

而觴之于廟

秦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련 不敢食一杯

三日而死

 

- 至樂 5

 

새를 사랑하는 방법은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과 다르다. 그런데 노나라 제후는 새를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했다. 새에게 술을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고기를 먹게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면 새도 좋아하는 줄로 알았다. 어리석은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무릇 새는 깊은 숲 속에 깃을 들게 하고, 호숫가에 노닐게 하고, 강과 호수에 떠다니게 하고, 미꾸라지와 피라미를 먹이고, 짝과 엉켜 살게 해야 한다. 그것이 새의 본성이다. 사람의 말, 사람의 음악에 새들은 듣고 날아가 버린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살 수 있으나 사람은 물 속에서 죽는다. 서로 좋고 싫음이 다른 것은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장자가 말하려는 바는 분명하다. 그대로 놓아둬라. 무언가를 이루려는 것은 자연의 도에 어긋하는 짓이다. 이것은 장자 당시에 윤리나 도덕의 굴레를 씌우려는 유가를 비롯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넓게 해석하면 작금에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다른 인간에 대하여 하는 짓거리가 다 이렇다. 현재의 학교 교육 시스템도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붙잡힌 바닷새인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가 지금의 극단적인 자본주의 체제라고 볼 수도 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우리는 갇히고 길들여져서, 물신숭배의 신도가 되어서, 힘겹게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바닷새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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