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장자[113]

샌. 2010. 4. 5. 10:40

열자께서 여행을 하다가 길에서 밥을 먹었다.

우연히 백 살의 해골을 발견하고

쑥대를 뽑아 가리키며 말했다.

"오직 너와 나만이

삶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아는구나!

해골은 과연 근심할까? 나는 과연 즐거운 것인가?"

列子行 食於道

從見百歲촉루益

건逢而指之曰

唯予與我知

而未嘗死未嘗生

若果養乎 予果歡乎

 

- 知樂 6

 

어제가 부활절이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으로부터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곧 악에 대한 선의 승리, 절망에 대한 희망의 승리다. 죄에서의 완전한 해방이다. 기독교는 악과 죽음의 세력에 대한 신의 심판과 섭리의 완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 죽음은 이기고지고 할 것이 없다. 삶과 죽음은 자연의 순환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해가 뜨거나 해가 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변화다. 자연의 변화는 완성을 향한 단선 구조가 아니라 순환형이며, 삶과 죽음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죽음만큼 인간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모든 종교나 사상은 죽음의 공포에 대해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대체로 서양의 종교나사상이 투쟁적이고 도전적이라면, 동양은 순응과 조화다. 기독교의 원죄는 극복되어져야 할 것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만 했다. 인류의 구원은 초월자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원죄의 개념 자체가 없다. 그러한 것은 자연관이나 인간관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인간은 자연계 대순환의 일부로 자연의 도(道)에 참여한다. 기(氣)는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이합집산을 거듭 한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물은 수증기로 변하고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로 내린다. 자연의 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장자에는 해골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과연 삶과 죽음을 호오(好惡)로 나눌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즐겁고, 해골은 과연 슬플까? 그런 물음을 통해 장자는 삶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려고 한다. 삶에 집착한다는 것은 현세의 욕망에만 마음을 빼앗긴다는 뜻이다. 높은 하늘과 넓은 바다를 알지 못한다. 마치 원효처럼 해골을 통한 충격요법이 깨달음에 이르는 문이 되기를 장자는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삶의나침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자[115]  (0) 2010.04.23
장자[114]  (0) 2010.04.09
장자[112]  (0) 2010.03.31
장자[111]  (0) 2010.03.24
장자[110]  (0) 2010.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