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장자[109]

샌. 2010. 3. 7. 07:43

장자의 부인이 죽어 혜자가 문상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莊子妻死 惠施弔之

莊子則方箕踞

鼓盆而歌

 

- 至樂 2

 

장자만큼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평판에는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는다. 그런 것이 때로는 괴팍하게 보인다. 이 예화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죽었는데 도리어 항아리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혜자가 보기에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곡을 안 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혜자는 힐난한다. 장자는 처음에는 자신도 슬펐다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아내의 시원을 살펴보니 본래 생명이란 없었소. 생명뿐 아니라 형체도 없었고, 형체만이 아니라 기도 없었소. 무엇인가 혼돈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생겼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고, 형체 속에서 생명이 생겼소. 그리고 오늘은 다시 변해서 죽음이 된 것이오. 이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이 운행하는 것과 같을 뿐이오. 그런데 누군가 천지라는 거대한 방에 누워 잠을 자려 하는데 내가 소리를 지르며 곁에서 운다는 것은 천명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곡을 그친 것이오."

 

장자의 사생관이 잘 드러나 있는 말이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원래의 상태로 돌아감[歸]이다. 우리말에서도 죽음을 '돌아가셨다'로 표현하고 있다.생사란 변화의 자연스런 한 과정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끝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만약 구름이 어느 한 모양만 고집하며 변화하는 것을 슬퍼한다면우스갯감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도 마찬가지다. 장자가 볼 때 죽음은 존재의 다른 양태일 뿐이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삶에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소크라테스의태도도 기억할 만하다. 그는 우는 제자들을 보며 "참 이상한 사람들 다 보겠다."며 탄식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마치 종기가 터지듯이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이다. 그러니 이웃에게 빚 진 닭 한 마리를 갚아달라는 유머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소멸과 끝이라는 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즉, 무지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의 허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예들은 장자나 소크라테스처럼 제대로 눈을 뜬다면 생사를 초월하는 달관의 경지에 누구라도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슬픔의 감정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장자의 이 미치광이로 보이는 사례도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너무 삶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생각하고 싶다. 아내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장자가 나에게는 훨씬 더 장자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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