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3

살그머니 / 강은교

비 한 방울 또르르르 나뭇잎의 푸른 옷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가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도 살그머니 열리네 햇빛 한 자락 소올소올 나뭇잎의 푸른 줄기세포 속으로 살그머니 걸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쓰다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폭풍에 펄럭펄럭 휘날리는데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로 걸어가는데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를 쓰다듬는데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 나뭇잎의 푸른 피톨들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살그머니 감싸안는데 살그머니 너의 속살을 벗기고 가슴호주머니를 만지니, 살그머니 열..

시읽는기쁨 2009.04.21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

시읽는기쁨 2008.01.15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사랑법 / 강은교 이 시의 깊고 고요한 울림처럼 살고 싶다. 분주하지 말고, 안달하지 말고, 부산떨지 말고, 그리고 무엇에도 매달리지 말고..... 내 안의 굳은 날개, 말라버린 강물, 잠든 별들을 그대로 있으라 놓아두고..... 서둘지..

시읽는기쁨 2006.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