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3

버버리 곡꾼 / 김해자

봄여름가을 집도 없이 짚으로 이엉 엮은 초분 옆에 살던 버버리, 말이라곤 어버버버버밖에 모르던 그 여자는 동네 초상이 나면 귀신같이 알고 와서 곡했네 옷 한 벌 얻어 입고 때 되면 밥 얻어먹고 내내 울었네 덕지덕지 껴입은 품에서 서리서리 풀려나오는 구음이 조등을 적셨네 뜻은 알 길 없었지만 으어어 어으으 노래하는 동안은 떼 지어 뒤쫓아 다니던 아이들 돌팔매도 멈췄네 어딜 보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팔뜨기 같은 눈에서 눈물 떨어지는 동안은 짚으로 둘둘 만 어린아이 풀무덤이 생기면 관도 없는 주검 곁 아주 살았네 으어어 버버버 토닥토닥 아기 재우는 듯 무덤가에 핀 고사리 삐비꽃 억새 철 따라 꽃무덤 장식했네 살아서 죽음과 포개진 그 여잔 꽃 바치러 왔네 세상에 노래하러 왔네 맞으러 왔네 대신 울어주러 왔네 어..

시읽는기쁨 2015.12.23

남자보다 무거운 잠 / 김해자

꿈이랑가 생시랑가 머시 묵직한 거시 자꼬 눌러싸서 눈 떠본께 글씨, 나, 배, 우에, 올라타 있드랑께 워어메 이거시 먼 일이여, 화들짝 놀라 이눔 새끼를 발로 차버릴라고 했는디 이눔의 나무토막 같은 다리가 말을 안 듣는겨 죙일 서갖꼬 콩콩 프레스를 밟아댄께 참말로 이 다리가 내 다리여 놈의 다리여 이 급살 맞을 놈, 콱 죽여분다 이 신발 밑창 같은 새끼, 겨우 몇 마디 하고 글시 다시 스르르 눈이 감겨버렸나 벼 포옥 한숨 자고 포도시 눈이 떠졌는디 아즉도 꿈이랑가, 워메 그 인사가 아즉도 엎어져 있는겨, 와따 여즉도 안 갔소이, 머시 좋은 거이 있다고 고렇코롬 자빠져 있소, 눈 붙이고 난께 존 말라 타일러집디다이, 낼 일할라믄 질게 자야 쓴께 지발이나 빨리 가랑께요, 근디 이 본드 발른 밑창 같은 작자가..

시읽는기쁨 2014.11.07

내가 대통령이면 / 김해자

큰일은 절대 하지 않으리 정권 바뀔 때마다 뒤집어엎는 백년지대계 같은 일에 손대서 안 그래도 어질어질한 우리 아이들 갈팡질팡 비틀대지 않게 하리 다만 아주 작은 것,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작고 작아 티도 안 나는 일 몇 가지는 해야지 교실마다 황토빛 은은히 도는 커튼을 치고 향나무 침대 몇 개 두어 쉬는 시간에 아이들 쉬어가게 해야지 졸려서 눈꺼풀이 내려앉는 아이들 몇 분이라도 허리 쫙 펴게 글자로 하는 공부에 흥미 없는 아이들은 들로 밭으로 쏘다니게 해야지 가만히 누워 하늘 올려다보게 가만히 앉아 이슬 한 방울 바람이 흔드는 쑥잎 하나 가만히 들여다보게 들여다보다 들여다보다 그 속으로 들어가도록 쑥부쟁이 되고 개미가 되고 흙이 되고 하늘이 되고 야생 고양이 되고 바람이 되고 바람과 하늘의 영혼으로 ..

시읽는기쁨 2010.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