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문재 3

아름다운 얼굴 / 맹문재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 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일이었다 - 아름다운 얼굴 / 맹문재 고운 우리말 하나를 배웠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고 한다. '물비늘'과 비슷하지만 '윤슬'이 좀 더 신비하고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시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

시읽는기쁨 2016.02.11

염소 / 맹문재

벚꽃이 어지럽게 떨어진 길을 어미 염소가 타달거리며 가고 있다 그 뒤에는 새끼 두 마리가 아니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총총 따른다 우스꽝스러운 몇 가닥의 턱수염 같은 기침을 가끔씩 내뱉으며 간다 어디를 보더라도 새끼를 데리고 갈 힘이 어미 염소에게는 없다 그리하여 가던 걸음 멈추고 구치소의 아들을 면회하는 아버지 같은 얼굴빛으로 하늘을 쳐다본 뒤 다시 길을 간다 그림자가 그 어떤 길도 마다하지 않고 주인을 따르듯 옛날의 어미가 갔던 길을 따라 간다 어미 염소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른다 단지 새끼 두 마리가 아니 열 마리 스무 마리가 뒤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새끼들이 힘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 염소 / 맹문재 인간이 가는 길도 염소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읽는기쁨 2012.04.25

집 / 맹문재

자정인데 작은방에 있는 아내가 급히 부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달려갔는데 거미를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거미는 목욕탕 굴뚝같이 높은 방구석에 제법 집다운 집을 지어놓고 있었다 나는 거미를 잡을 수 없다고 했다 뜻밖의 대답에 놀란 아내는 왜 잡을 수 없느냐고 항변했다 토끼풀꽃 같은 집을 지은 거미에게 원망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거미한테 원망 듣는 것은 무섭고 마누라한테 원망 듣는 것은 안 무섭느냐고 아내가 따졌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원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나는 아내의 방을 나왔다 자정이 넘어 잡을 수가 없네요 - 집 / 맹문재 한국인의 유별난 가족주의는 사회 문제의 원인을 진단할때 늘 감초처럼 끼어든다. 가족 사이의 끈끈한 정, 정서적 교류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 가족밖에 모르는 가족 이기주의는 ..

시읽는기쁨 2007.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