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욕 6

새해 인사 /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시겠습니까? - 새해 인사 / 나태주 2024년 새해가 열렸다. 꿈 없이 꿀잠을 자고 난 첫날 아침이다.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고 설레는 소년이 되어도 본다. 그러다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글자가 환등기의 영상처럼 눈앞에서 명멸한다. '빈 손'이라는 말이 전해주는 느낌이 정겹고 따스하다. 시인의 새해 ..

시읽는기쁨 2024.01.01

힘 빼는 데 3년

"힘을 빼라" "부드럽게 밀어라", 당구를 칠 때 옆의 고수한테서 자주 듣는 말이다. 수 년째 똑같은 지적을 받고 있으나 말처럼 쉽지 않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깨에 힘을 빼라는 충고를 수도 없이 들었다. 아마 10년 정도 지나서야 그런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힘 빼는 데 3년이 걸린다고 운동선수들이 흔히 말한다. 전문 선수들이 그럴진대 일반 아마추어는 오죽하겠는가. 운동에서 힘 빼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힘이 들어가는 이유는 이기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힘주어 친다고 공이 세게 나가는 게 아니다. 근육이 경직되면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잘하려는 마음이 앞서니 몸에 힘만 잔뜩 들어갈 뿐이다. 멘털 스포츠인 바둑도 마찬가지다. 힘이 들어간 수는 ..

참살이의꿈 2021.02.02

이럴 수도 있지

낯선 외국에서 고생도 많이 했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가진 재산 다 털어먹고 빚까지 졌어. 희망이 없었어. 가족은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혼자서 뒷정리를 했어. 살아갈 일이 막막하더군.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며 스페인 북부로 정처 없이 떠났어. 사람이 적고 쓸쓸한 풍경을 택한 거지. 며칠 동안 바닷가를 배회하니 가진 돈도 다 떨어졌어. 절벽 위에도 서 봤지만 도저히 뛰어내릴 용기는 없더군.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파 바닷가에 있는 허름한 집 대문을 노크했어. 노부부 두 분이 사는데 따뜻이 맞아주더군. 내 행색이 그랬나 봐.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며 그 집에서 한 달을 함께 지냈어. 그분들도 자식처럼 대해줬어. 저녁을 먹고 나면 두 분은 소파에서 손을 맞잡고 TV를 보는 거야. 작은 화면에 금방 고장이라도..

참살이의꿈 2019.07.15

프리터

프리터(Freeter)란 프리(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의 합성어로, 정규직 대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며 자유롭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어쩔 수 없이 프리터가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진정한 프리터는 정규직을 자의로 포기하고 최소한의 일을 하는 선택하는 사람이다. 한 달에 100만 원 정도의 수입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어야 한다. 시간당 1만 원으로 계산해서, 하루에 5시간씩 20일 일하면 1백만 원이 나온다. 이런 프리터가 일본에서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얼마 전 신문에 충북 청주에 사는 프리터 한 분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커피 전문점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로 버는 50만 원으로 한 달을 산다. 월세와 관리비로 22만 원, 휴대폰비와 교통비로 10만 원, 나머지는 식비..

참살이의꿈 2019.02.24

나룻물 강생원의 배삯 / 곽재구

나룻물 강생원 젊어서 제월리 나루터의 뱃사공이었지요 남원 장 보러 옥과 입면 사람들 강생원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넜는데요 배가 남원 땅에 다 닿으면 장꾼들에게 꼭 이렇게 말하지요 어 참 봄볕도 좋다 돌아올 때 꽃 한 짐 꺾어 오시오 이를테면 그 말이 곧 뱃삯이었는데 장 보고 오는 동네 사람들 돌아오는 길에 진달래꽃 꺾고 살구꽃도 꺾고 수선화꽃이랑 조팝꽃도 실컷 꺾어서는 한아름씩 강생원에게 주었겠지요 한 배 가득 장 보따리와 꽃다발을 싣고 다시 강을 건너며 나룻물 강생원 꼭 이렇게 말하지요 어 참 꽃 좋다 어 참 세상 이쁘다 - 나룻물 강생원의 배삯 / 곽재구 사람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삶이 축제가 될 수는 없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바라기 때문에 삶의 핵심을 도리어 놓치는지도 모른다. 나룻..

시읽는기쁨 2012.10.28

평온한 삶 / 포프

물려받은 몇 마지기 땅 외엔 더 바랄 것도 더 원할 것이 없고 제 땅에 서서 고향 공기를 들이마시며 흡족한 자는 행복한 사람 소 길러 우유 짜고 밭 갈아 빵을 얻고 양떼 길러 옷 만들고 나무에서 여름철엔 그늘을 겨울철엔 땔감을 얻네 날마다 조용히 근심걱정 모르고 매순간, 매일, 매년을 스쳐보내는 건강한 육신, 평온한 마음을 가진 자는 복 받은 사람 밤에는 편히 자고, 배우다 때로 쉬니 더불어, 상쾌한 여유로움 그 순박함은 고요한 명상과 더불어 더욱 흐뭇해지네 나 또한 이처럼 흔적 없이 이름 없이 살다 미련 남기지 않고 죽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구나 내 누운 곳 말해줄 비석조차 하나 없이 - 평온한 삶 / 알렉산더 포프 Happy the man whose wish and care A few paternal..

시읽는기쁨 2011.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