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6

안동 숙맥 박종규 / 안상학

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 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오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 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안동 숙맥 박종규 / 안상학 오늘 점심은 시장에 나가 국수를 먹었다. 잔치국수 한 그릇에 4천 원이다. 집은 허름하지만 국수는 맛있고 양도 푸짐하다...

시읽는기쁨 2019.03.17

깡통 /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깡통 / ..

시읽는기쁨 2016.01.30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가 쓴 책 제목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것도 같은데 내용은기억나지 않는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책 제목이 모든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세상의 바보들에게는 시니컬한 웃음 하나면 충분하다. 세상은 바보들 천지다. 주변을 돌아보라. 자신이 바보인 줄도 모르는 진짜 바보들이 아주 많다. 그런 바보들 속에서 나 역시 같은 바보짓을 하며 살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미쳐 돌지 않을 도리가 없을 텐데,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걸 보니 나도 바보임이 분명하다. 바보들 세상에서는 거꾸로 된 바보처럼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바보 XXX' 하며 '바보'라는 이름을 자랑스레 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바보에도 급이 있다. 재미있는 세상이다. 오..

길위의단상 2012.05.10

어느 바보의 삶

윤구병 선생이 감동을 받은 이야기라며 소개한 걸 보았다. 실화라고 한다. 충청북도 어느 시골에 농부 한 분이 살았는데, 아주 성실하고 총명하였다. 이분은 1920년대에 야학에서 한글을 깨우쳤다. 해방이 되기까지 스무 해 남짓 걸핏하면 주재소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행적으로 보면, 한글과 함께 민족의식도 깨우쳤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하도 많이 맞아서 지게에 실려 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똥물을 마시면서 몸을 추슬렀는데, 동네 사람들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 닮아서 법 없이도 살 이분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몰랐다. 다만 어쩌다 철없는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왜놈 말을 쓰는 걸 보면 몹시 야단을 친다든지, 대동아전쟁 말기 왜놈들이 쇠붙이란 쇠붙이는, 하다못해 부러진 숟가락 몽당이까지 빼앗아 갈 ..

참살이의꿈 2011.07.21

바보 이력서 / 임보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 바보 이력서 / 임보 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이력서란 걸 거의 써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동으로 취직이 되었고, 그 뒤로는..

시읽는기쁨 2010.01.31

바보

'금주의 명언', '오늘의 명언'....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에는 이런 제목을 단 명언들이 흔히 붙어 있다. 그것도 꼭 눈높이 되는 곳에 있어 눈을 감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한다. 마치 볼 일 보는 때까지 따라온 도덕선생님 같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해우소에서까지 훈계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어느 공공화장실에서 이 경구를 만났다. '가르친다는 허영심은 때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잊도록 유도한다.' . . 뜨끔.... . . . 그래도, 오줌발이 멈칫한 걸 보니 바보는 바보로되 마냥 대책 없는 바보는 아니렸다....

사진속일상 2009.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