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2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 송찬호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합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 번 보내주신 약 꾸러미 신문 한 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오 병이 깊은 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 이곳에 숨어..

시읽는기쁨 2018.11.10

가을 /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 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울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날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

시읽는기쁨 2008.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