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5

풀 / 김재진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 풀 / 김재진 '아름다움'은 '앓음'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예술 작품을 보라. 창작 과정의 고통과 아픔 없이 나오는 명작은 없다. 상처의 향기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풀은 자신의 전 생이 베어지는 때에 향기를 낸다. 원망과 한탄의 늪에 빠지거나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는다. 상처에서 나오는 악취는 썩는 신호다. 향기는 생명 의지의 표현이다. 상처의 향기가 아름다움이다.

시읽는기쁨 2019.08.30

초망한 소원 / 이경학

울 엄니 한 번 업어봤으면.... 출세해서 이층집 짓는 욕심은 예전에 부질없는 것인 줄 깨달았고 통일되어 아버지 모시고 고향가는 꿈은 엊그제 신문에서 미적미적 멀어졌으나 이 새벽 닥친 추위에 이불자락 끌어당기며 끝까지 놓치지 않은 하나 남은 소원은, 울 엄니 한 번 업어드려 봤으면.... 휠체어 박차고 일어나 두 발로 떳떳이 서서 울 엄니 따스한 배를 내 등허리에 얹어봤으면.... 저 작은 여인네 손주 안아보시겠다고 연세 많이 드셔서도 끝내 균형을 잃지 않고 계시니, 천성이 명랑한 아낙네 아들 사람 되는 꼴 보시겠다고 그 모진 세월에도 걸음걸이 빠르고 반듯하시니.... 달랑 업고 동네 한 바퀴 돌아봤으면.... 오래 사시겠다고 다짐하시는 뜻이 나 일어설 때까지 곁에서 지켜주시겠다는 것이니 그 의지를 믿고..

시읽는기쁨 2014.08.30

멘토와 힐링의 시대

전에 현직에 있었을 때 신임 교사의 멘토가 되라는 부탁을 받았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거절했더니 그냥 형식상 보고만 하면 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경력 교사가 신임 교사와 멘토-멘티 관계를 맺음으로써 학교 생활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라는 발상 같았다. 학교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굳이 멘토라는 말을 써가며 드러내야 하는지 회의가 들었던 게 사실이다. 멘토와 힐링이 유행인 시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선배로서의 스승이 필요하고, 상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한 건 당연하다. 어느 시대인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유독 요사이 들어 멘토와 힐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멘토와 힐링의 대상은 대부분 젊은이들이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아프고 방황하고 있다는 증좌인지 모른다. 제대..

참살이의꿈 2013.03.14

무릎을 잊어버린다 / 엄원태

한동안 무릎은 시큰거리고 아파서 내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아침산책 몇 달 만에 아프지 않게 되자 무릎은 쉽게 잊혀졌다. 어머니는 모시고 사는 우리 부부에게 무관심하고 무뚝뚝하시다. 때로는 잘 삐치시고 짜증까지 내신다. 어머니 보시기에, 우리가 아프지 않은 탓일게다. 아직도 삼시 세 끼를 꼭 챙겨드려야 마지 못한 듯 드신다. 어쩌다 외출이 길어져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그때까지 밥을 굶으시며 아주 시위를 하신다. 어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아픈 무릎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안 깨물어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아우는 마흔 넘도록 대척지인 아르헨티나로 멕시코로 홀로 떠돌아다닌다. 아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각별하시다. 아우는 어머니의 아픈 무릎이다. - 무릎을 잊어버린다 / 엄원태 누구에게난 아픈 무릎..

시읽는기쁨 2009.02.09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마음의 통증에는 주소가 없다. 어떨 때는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온다. 원인을 모르는 신체의 병처럼,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정체 모를 통증은 두렵고 아프다. 지나간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모든 통증의 배후에는 그리움이 숨어 있다. 이루지 못한, 그냥 흘러보낸, 또는 아쉬움 같은 것, 그런 것들이 통증의 뒤..

시읽는기쁨 2008.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