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3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시인이 그리는 풍경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리다. 산다는 게 뭘까? 부부의 연은 또 무엇일까? '서로 모르는 사..

시읽는기쁨 2020.11.12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1000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

시읽는기쁨 2020.08.31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전미정 님의 ‘상처’에 대한 아래 글을 읽는 것으로 시 감상에 대신한다. 상처는 마술이다. 그렇게 흉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꽃처럼 피어 살랑거리고 있으니까. 젊은 날에는 들킬 새라 그렇게 숨겨두던 상처가 다른 모습으로 승화되니 감탄스럽기 그지없다. 어쩌다 이야기보따리를 풀게 되면 서로들 상처 하나씩을 꺼내어 보여 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상처가 피고 졌다가 다시 피어났다는 이..

시읽는기쁨 2011.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