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 3

겨울 냉이 / 고명수

폭풍한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냉이는 자란다 낙엽과 지푸라기 아래 숨어 봄을 기다리는 냉이, 행여 들킬세라 등 돌리고 있는 냉이를 더듬더듬 찾아내어 검불을 뜯어낸다 봄 내음이 나는 냉이국을 먹으며 낙엽과 지푸라기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마침내 싹을 틔워낸 냉이를 생각한다 가파른 삶의 벼랑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냉이를 보라 서슬 푸른 정신으로 살아야 하리라 서슬 푸른 눈으로 살아야 하리라 겨울 냉이가 자신을 이기듯이 몰래 숨어 자란 냉이가 온몸을 우려내어 시원한 된장 국물이 되듯이 우리도 누구엔가 시원한 국물이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수서원 돌담길에도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에도 숨어있을 냉이, 환한 한 마디의 말씀이 오랜 궁리와 연찬에서 솟아나듯이 청빙(淸氷)을 뚫..

시읽는기쁨 2013.01.17

기다리는 시간 / 서정홍

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사람을 기다리다 보면 설레는 마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으면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지 생각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사람을 기다려 주는 일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다음에 또 기다려 주는 일 나는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 기다리는 시간 / 서정홍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기다리기를 잘 못한다. 며칠 전이었다. 후배 Y와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왔다. 나는 불 같이 화를 내었다. 나는 시간 약속 못 지키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도대체 벌써 몇 번째야, 후배는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내에게 주로 화를 낼 ..

시읽는기쁨 2010.10.04

꽃은 절벽에서도 웃으며 핀다

사무실 밖에 수직으로 서 있는 시멘트 축대의 갈라진 틈에서 제비꽃 한 송이가 꽃을 피웠다. 틈이래야 폭이 실처럼 가는데 그 안으로 씨가 들어간 것도 신기하거니와 속에 무슨 흙이 있는지 싹이 트고 꽃을 피운 것이 희한하기만 하다. 빗물조차도 그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꽃은 여느 기름진 땅에서 핀 제비꽃에 못지않게 크고 튼실하다. 나는 생명의 신비가 놀라워 매일 한 번씩 그 제비꽃을 찾아가 본다. 어떤 때는 물이라도 뿌려주고 싶지만 괜히 쓸데없이 간섭하는 것 같아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제비꽃을 바라볼 때면 아무 이유 없이 서글프고 고맙기만 하다. 작은 들꽃은 자신의 위치나 입장을 비관하지 않는다. 씨앗이 자갈밭에 떨어지든 옥토에 떨어지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

길위의단상 2008.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