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7

김씨 / 정희성

돌을 던진다 막소주 냄새를 풍기며 김씨가 찾아와 바둑을 두면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나를 노엽게 한다 한 칸을 뛰어봐도 벌려봐도 그렇다 오늘따라 이렇게 판은 넓어 뛰어도 뛰어도 닿을 곳은 없고 어디 일자리가 없느냐고 찾아온 김씨를 붙들고 바둑을 두는 날은 한 집을 가지고 다투다가 말없이 서로가 눈시울만 붉히다가 돌을 던진다 취해서 돌아가는 김씨의 실한 잔등을 보면 괜시리 괜시리 노여워진다 - 김씨 / 정희성 어제 양재기원에서 고씨와 만나 근 2년 만에 바둑을 두었다. 바둑팀이 해체된 뒤로는 바둑 둘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지인 중에는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는 바둑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바둑이 노년의 좋은 취미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맞는 수담(手談) 상대를 만나기가 어렵다. 삶이 ..

시읽는기쁨 2019.07.11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민지의 꽃 / 정희성 순백의 지순한 마음을 생각한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걸 다, 꽃이야, 라고 부르게 될까. '아이는 어른의 ..

시읽는기쁨 2018.01.03

그리운 나무 / 정희성

사람은 지가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 가까이 가서 서성대기도 하지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을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 그리운 나무 / 정희성 누군가가 우주를 '색(色)과 욕(欲)'으로 정의한 걸 본 적 있다. '욕(欲)'이라는 단어에서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면, '그리움'으로 바꿔 불러도 좋겠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모든 존재는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나무가 인간을 본다면 얼마나 수선스럽게 보일까? 한 자리에 가만있지 못하고 쉼 없이 돌아..

시읽는기쁨 2013.06.14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그립다'는 말만큼 정겨우면서 가슴을 울리게 하는 말도 드물다. 그리움은 우리 마음 속의 깊고 심원한 그 무엇에 닿아 있는 정서다. 그리움은 우리가 떠나온 영혼의 고향에 연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리움은 거기에 이를 수도 없고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므로 슬픔이라고 부..

시읽는기쁨 2008.12.26

숲 /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숲 / 정희성 도시의 나무들은 '더불어 숲'을 이루지 못한다. 아니, 숲을 이루지 못하는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광화문 지하도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은 메마른 사막의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소리만 낸다.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시읽는기쁨 2006.03.16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 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 정희성 가끔은 이런 명랑시를 읽으며 빙긋 웃고 싶다. 성(性)과 성(聖)은 원래 한 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태초에는 그 어떤 구별도없었으리라.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성(性)은 부끄럽고 은밀한 것으로 변했다. 이제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려는지 성(性)은 개방되고 상품화되어 여기저기서 흘러 넘친다. 너무 많은 정보와 과도한 드러냄의 문제점은 성(性)..

시읽는기쁨 2006.01.24

길 / 정희성

길(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

시읽는기쁨 2003.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