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김씨 / 정희성

샌. 2019. 7. 11. 11:36

돌을 던진다

막소주 냄새를 풍기며

김씨가 찾아와 바둑을 두면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나를 노엽게 한다

한 칸을 뛰어봐도

벌려봐도 그렇다

오늘따라 이렇게 판은 넓어

뛰어도 뛰어도

닿을 곳은 없고

어디 일자리가 없느냐고

찾아온 김씨를 붙들고

바둑을 두는 날은

한 집을 가지고 다투다가

말없이 서로가 눈시울만 붉히다가

돌을 던진다

취해서 돌아가는 김씨

실한 잔등을 보면

괜시리 괜시리 노여워진다

 

- 김씨 / 정희성

 

 

어제 양재기원에서 고씨와 만나 근 2년 만에 바둑을 두었다. 바둑팀이 해체된 뒤로는 바둑 둘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지인 중에는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는 바둑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바둑이 노년의 좋은 취미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맞는 수담(手談) 상대를 만나기가 어렵다.

 

삶이 스산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삶은 고단하다. 바둑판 앞에 무심(無心)으로 앉으라 한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하철역에서 헤어지며 돌아서는 고씨의 뒷모습이 쓸쓸했다. 이젠 노여워할 대상도 남아 있지 않은가? 종반전에 이른 한판의 바둑, 승패는 결정 났고 통상적인 끝내기는 무료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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