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미 2

온돌방 / 조향미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해 좋을 땐 마당에 마루에 소쿠리 가득 궂은 날엔 방 안 가득 무 향내가 났다 우리도 따순 데를 골라 호박씨를 늘어놓았다 실겅엔 주렁주렁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윗목에선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아랫목 술독엔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강정을 한 방 가득 펼쳤다 문풍지엔 바람 쌩쌩 불고 문고리는 쩍쩍 얼고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아침 나팔꽃처럼 금세 활짝 피어나곤 한다 아, 그 온돌방에서 세월을 잊고 익어가던 메주가 되었으면 한세상 취케 만들 독한 밀주가 되었으면 아..

시읽는기쁨 2020.01.04

담임 선생 / 조향미

아침에 출석부 들고 교실에 들어서면 인상 쓸 일 수두룩하다 앉아라 줄 맞춰라 휴지 좀 주워라 수희 나영이 또 지각이구나 이슬인 오늘도 결석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째려보고 전달사항 몇 개 툭 던져 두고 나오면 아이들 몇 명 쭐래쭐래 따라 나오며 선생님 오늘 야자 빠져야 해요 치과 가야 해요 생리통이 심해요 학원 보충 있어요 엄마 생신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점심시간에 내려와 교직 이십년 의욕도 열정도 시들해진 담임 생활 올해 애들은 유난히 천방지축이야 투덜대지만 생각해보면 마음으로 미운 놈 하나 없다 작년 처음 만나 일주일에 두어 시간 수업할 땐 저기 몇 놈들 정말 고운 구석 없이 밉상이더니 담임 맡은 올해 사흘 걸러 지각하고 결석하는 놈도 온 교실 제멋대로 어지르고 다니는 놈도 수업시간 꾸벅꾸벅 잠만 자는 ..

시읽는기쁨 2007.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