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2

안내 방송 / 주미경

아, 아, 오늘 늘푸른공원에 약을 친다고 합니다. 단풍나무 길 거위벌레 씨 아기 방 창문 꼭 닫아 주세요. 벚나무 길 자벌레 씨 아침 운동 참아 주시구요. 꽃등에 씨 라일락꽃은 비 온 뒤에 찾아 주세요. 아, 아, 돌배나무 길 비단벌레 씨 비단 마스크 하나 빌릴 수 있을까요. 참, 말매미 씨 바쁘시더라도 때맞춰 사이렌 부탁합니다. - 안내 방송 / 주미경 아파트 단지 안 수목에 약을 친다는 안내 방송이 가끔 나온다. 약이 들어갈 수 있으니 저층 세대는 창문을 닫아 달라고 당부하는 방송이다. 그런데 이 시를 보고 뜨끔했다. 인간의 입장에서만 볼 줄 알았지, 나무에 살고 있을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점을 바꾸면 이렇게 신선한 시도 나온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

시읽는기쁨 2020.04.06

맘도 두지 말고 / 주미경

빈 땅을 보면 노는 땅 아깝다 그러지 말고 딱정벌레 방 내주고 풀꽃이나 피우면서 한 해 놀게 두자 집도 짓지 말고 콩도 심지 말고 맘도 두지 말고 - 맘도 두지 말고 / 주미경 고향에서 어머니가 부치는 밭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힘에 부쳐서 모두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내년에는 한 마지기 정도는 놀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노는 땅을 보면 혀를 찼던 어머니지만 이제는 어찌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신다. 빈 자리에 딱정벌레가 찾아오고 풀꽃이 사는 걸 보는 것도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갈고 닦고 하는 것보다 가끔은 텅 빈 자리 그대로 두는 것도 필요하다. 이젠 그만 채워 넣어야 한다. 비닐을 걷어내고 비바람 그대로 맞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

시읽는기쁨 2017.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