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토요 걷기>는 문경새재길을 걸었다. 마침 모 단체에서 문경새재를 탐사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동료들과거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버스 한 대에탄 일행은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두 시간여가 걸려 문경새재 3 관문 쪽 주차장에 닿았다. 여기서부터는 각자 소속된 그룹들끼리 새재길을 걸어서 1 관문에서 만나기로 시간 약속을 했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 조령산의 남과 북을 잇는 고개다.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로를 잇는 가장 짧고 험한 고개로사회 모든 면의 요충지였다 하겠다. 특히 최근에는 이곳에 터널을 뚫고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겠다는 대운하 발상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새재[鳥嶺]라는 말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그만큼 험하다는 뜻일 터인데,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임진왜란때 이곳 방어에 실패한 후 조령관, 조곡관, 주흘관의 3 개의 관을 설치하고 국방의 요새로 삼았는데 이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과거길의 애환이 서린 곳이어서 여러가지 설화나 그에 관계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문경새재길은 무엇보다도 걷기에 좋은 길이라는 것이다. 조령관에서 주흘관까지는 약 6.5 km인데 맨발로 걸어도 좋을 흙길과 함께 옛 오솔길이 군데군데 남아있어 산책로로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었다 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조령관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마지막 가을 단풍이 화려했다. 때가 늦었다고 생각되어 단풍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는데의외로 산의 높은 곳인데도 단풍은 절정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려 주었다.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든 단풍이 무척 고왔다.
단풍을 시샘하는지 때 아닌 개나리도 피어나 자신을 봐 달라고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늦가을에 만나는 개나리는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철딱서니 없기로서니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러나 개나리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제3 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은 단풍이 더욱 붉었다.임진왜란 초기에 서울로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출동한 신립은 이곳의 험한 지형을 버리고 충주의 탄금대로 나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1 진과 맞서다가 참패를 당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 뒤에 서울이 함락되었다고 한다.
왜 신립은 전투 경험도 별로 없는 농민군을 이끌고 무모한 싸움을 했는지 의문이 든다. 군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병사의 수나 화력에서 열세일 때는 당연히 험한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말이다. 그런데 함께 한 동료가 당시 이곳 산속에 주둔하는 동안 겁을 먹은 농민군의 이탈이 너무 많아 장시간 버티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신립으로서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길 옆에 책바위라는 돌무더기가 있었다.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한다는 전설이 있으니이곳을 지나던 과거객들의 발걸음이 한 번씩 멈추었을 것이다.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기원을 담은 종이들이 책바위를 덮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수능을 앞두고 있어선지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문구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길이 문경새재였다. 영남대로와 연결되는 중앙통로이기도 했겠지만 추풍령과 죽령을 기피한 다른 이유도 있다고 한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것이 연상되고, 죽령 또한 이름에 대나무가 들어있으니 미끄러지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음직 하다. 그럴듯한 얘기다.
岐嶇鳥嶺似羊腸
瘦馬凌兢步步疆
爲報行人莫相怨
欲登高處望吾鄕
꾸불꾸불 새재 길 양장 같은 길
지친 말 부들부들 쓰러질 듯 오르네
길 가는 이 우리를 나무라지 마시게
고갯마루 올라서서 고향 보려함일세
- 어버이 보러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 서거정(徐居正, 1420 - 1488)
산 꿩 꾹꾹 시냇물 졸졸
봄비 맞으며 필마로 돌아오네
낯선 사람 만나서도 반가운 것은
그 말씨 정녕코 내 고향 사람일세
- 새재로 가는 길[鳥嶺途中] / 이황(李滉, 1501 - 1570)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졸졸졸 냇물 소리 들려오네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산 위에 뜬 달은 밝기도 해라
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늘그막 병치레 끊이질 않네
고향에 왔다가 서울로 가는 길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구나
- 새재에서 묵다[宿鳥嶺村店] / 유성룡(柳成龍, 1542 - 1607)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 지고 돌아간다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 새재에서 묵다[宿鳥嶺] / 이이(李珥, 1536 - 1584)
숲에서 큰 갈참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이 정도면 나이가 300 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다.
나무 줄기에 붙어서 사는 저 얼룩무늬가 지의류(地衣類)라고 K 형이 알려주었다. 얼핏 보면 이끼로 착각하는데 땅이나 바위에서도 살아간다. 지구상에 15000여 종이 있는데 극한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공해에는 약해서 금방 죽어버리기 때문에 공해지표생물로 지정되어 있다. 무수한 균들이 만드는 기하학적 무늬가 눈길을 끌었다.
문경새재길에서는 또한 이렇게 줄기에 상처가 난 소나무들을 자주 만난다. 이 상채기는 일제 말기에 전쟁 자원으로 쓰려고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라는데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 아픔이 남아있다.
연노란 색깔이 아름다웠던 이 나무 이름이궁금했다. K는 쪽동백나무인 것 같다고 했는데 확신을 하지는 못했다.
길 떠난 과객이 되어 주점에서 파전에 막걸리를 시켰다. 분위기를 낸다고 막걸리에 단풍잎을 띄웠는데 처음에는 나를 놀리더니 나중에는 다들 따라 했다.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눈 덮인 칡덩쿨엔 마른 잎 붙어있네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서울 쪽 하늘엔 초생달이 걸렸네
- 겨울 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3 시간여가 걸려서 제 1 관문인 주흘관에 도착했다. 문경 쪽 입구는 더욱 사람들로 붐볐다. 주말이어선지 올해의 마지막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이많이 찾아왔다. 새재길이 좋긴 하지만 너무 사람들로 붐벼서 아쉬운 점도 있었다.
문경새재길을 완전히 걸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에는 자가용을 가져간 탓에일부만 걷고 다시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새재길은 전보다 볼거리나 편의시설이잘 갖추어져서불편함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산채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일찍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한 뒤 우리는 감자탕으로 뒷풀이를 하고 헤어졌다.
* 걸은 구간 ; 제3 관문 주차장 - 조령관 - 조곡관 - 주흘관 - 제1 관문 주차장
* 걸은 시간 ; 10:30 - 14:00
* 걸은 거리 ; 약 8 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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