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11)

샌. 2008. 8. 8. 10:52



내가 클 때는 피서라든가 가족여행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여름이면 하루를 잡아 가족이 함께 인근의 희방계곡으로 소풍을 나갔다. 희방폭포 아래에 있는 계곡에 들어서면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했다. 부모님과 외할머니, 그리고 다섯 형제들이 하루를 놀다가 돌아왔다. 이런 가족 나들이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마 외지에 나가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아버님이 베풀어주신 특별한 이벤트였다고 생각된다. 당시에 시골 마을의 다른 집에서는 이런 가족 나들이가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이 사진은 내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해 희방폭포 앞에서 동생들과 찍은 것이다. 모습을 볼 때 막내만 아직 입학 전이었고, 나머지 동생들은 초등학생이었던 것 같다. 중학생인 나는 까까머리를 가리느라고 그랬는지 밀짚모자를 쓰고 있다. 지금 보면 모습들이 다들 촌스럽고 표정들이 굳어 있다. 남아 있는 사진 중에서도 제일 못난 모습이다. 그러나 당시는 아이들에게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저런 표정이야말로 그 시대를 나타내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가족 나들이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하는 것은 40여 년 전의 시절로서는 특별하고도 고급스런 행사였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부르주아적인 분위기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엄격하시기만 한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님의 가정적인 면모를 저 사진을 통해 느끼게 된다.


아버님은 다섯 형제 중에서도 막내를 가장 예뻐하셨다. 약주를 하고 오시는 날이면 마당에 들어서면서부터 막내를 찾으셨다. 그러면 귀찮게 하는 것을 아는 막내는 도망을 가고 아버님은 따라가는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아버님은 나중에 장군감이 될 거라며 막내만 보면 대견해 하셨다. 머리를 땋은 막내 여동생은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머리를 길렀는데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간 머리칼은 동네의 자랑이었다. 귀찮다 하시면서도 어머님은 오랜 시간 머리 손질을 해주셨다.


저 시절에 형제들은 서로 티격태격 하면서도 함께 어울리며 다정하게 살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나니 예전의 형제들의 정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우선 나부터가 동생들에게 신경을 써주는 일이 잘 안 된다. 그리고 피붙이인 탓에 하나의 잘못이나 실수, 또는 오해가 마음에 상처를 더욱 크게 남긴다. 저 사진을 보면서 우리 다섯 형제가 함께 모인 것이 언제였는지 헤아려보니 까마득하다. 슬픈 일이다. 언젠가는 형제간에 웃으면서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흑백사진에 색칠을 해서 칼라사진 같이 보이게 하는 게 한 때 유행했었다. 등교할 때면 교문 앞에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물건들을 파는 잡상인들이 있었다. 아저씨의 손끝에서 밋밋한 흑백사진이 화려한 칼라사진으로 변신하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따라 해 보겠다고 물감을 사서는 앨범에 있는 사진들을 저런 식으로 망쳐 놓았다. 지금 보면 저것도 하나의 추억이 되어 더욱 옛 생각에 젖게 한다. 지나간 소년 시절은 회고해 보면 모두가 그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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