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옳다. 청운동에 직장을 잡은지 5 년 째가 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세검정을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걷기를 좋아하는사람이 있어 이번에 같이 가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물론 걷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나로서는 세검정을 확인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세검정(洗劒亭)은 연산군 때탕춘대(蕩春臺)를 마련하고 유흥을 위해 세웠다는 설과, 숙종 때북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총융청(摠戎廳)을 건립하였는데 이곳에 있는 군인들의 휴게시설로 세운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 후 영조 24년(1748)에 중건하였고 이때 세검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세검정이라는 이름은 인조 원년(1623) 인조가 이귀, 김류 등과 함께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에 성공한 후 이 정자 아래로 흐르는 홍제천 물에 칼을 씻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 '세검(洗劒)'이라 함은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77년에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검정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그런 정치적인 것보다 정민 교수의 책에서 보았던 정약용의 '유세검정기(游洗劍亭記)'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다산의 젊은 시절의 활기가 잘 느껴지는 글에서 묘사된 세검정의 풍경에 다산이 놀러왔던 장소라는 의미가 더해져 세검정은 언제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다산만이 아니라 당시 한양에 살던 선비들은 누구나 한 번은 이 세검정에 들렀을 것이다. 다산의 글은 다음과 같다.
'세검정의 구경거리는 오직 소나기에 폭포를 보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비가 한창 내릴 때는 사람들이 비에 옷을 적셔 가며 말에 안장을 얹고 성밖[郊關(교관)]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비가 개면 산골 물도 벌써 조금 수그러들어 줄어진다. 이 때문에 세검정이 들판 사이에 있음에도 성 안[城中]의 사대부 가운데에 이 정자의 빼어난 경치를 만끽하는 사람은 드물다.
1791년(신해) 여름에 나는 한혜보(韓徯甫)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명례방(明禮坊)에서 조그마한 모임을 가졌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무더위가 찌는 듯 하였다. 먹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마른 우레 소리가 은은히 울렸다. 내가 술병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건 폭우가 쏟아질 조짐이야.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나? 만약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벌주 10병을 한꺼번에 주겠네."라고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가고말고!"라 하였다.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출발했다. 창의문(彰義門)을 나서자 벌써 비가 몇 방울 떨어지는데 크기가 주먹만 했다. 서둘러 내달려 정자 아래 수문에 이르자 양편 산골짝 사이에서는 이미 암코래 숫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했고, 옷소매도 얼룩덜룩하였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벌여놓고 앉으니, 난간 앞의 나무들은 이미 뒤집힐 듯 미친 듯이 흔들렸고, 마구 뿌려대는 비바람이 뼈에 스며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 물이 사납게 들이 닥치는데, 순식간에 골짜기를 메우고, 산골을 울리며, 물결은 사납게 쿵쾅거리며 세차게 흘러갔다. 모래를 일고 바위를 구르면서 콸콸 쏟아져 내렸다. 물줄기가 정자의 주춧돌을 할퀴는데 그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서까레와 난간이 온통 진동하였다. 두려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자! 어떤가."고 말하니, 모두들 "말할 수 없이 볼만하이!"라고 했다. 술과 안주를 내오게 하여 우스갯소리로 실컷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 물도 점차 잦아들었다. 저녁 햇살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온갖 모양들이 자줏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서로를 베개 삼아 베고서 시를 읊조리다가 누웠다.
조금 있으니까 심화오(沈華五)가 이 소식을 듣고 뒤쫓아 정자에 이르렀는데 물은 이미 잔잔해진 뒤였다. 처음에 심화오를 불렀는데도 오지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놀리며 욕을 했다. 그와 함께 한 순배 술을 더 마시고 돌아왔다. 그 때에 홍약여(洪約汝)와 리휘조(李輝祖), 윤무구(尹无咎) 등도 역시 함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검정은 도로와 주택가에 둘러싸여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위의 다산 글에 묘사된 세검정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개울 암반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물은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물마저 썩어 악취가 난다. 차라리 세검정을 머리속에서만 그리고 찾아오지 않음만 못하게 되었다. 책에는 정선의 '세검정도(洗劍亭圖)'가 나와있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 할 수 있다. 계곡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당시의 세검정은 심산유곡 속의 풍경이었다.
걷기는 세검정을 지나 홍지문과 보도각 백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독립문을 지나 서울역까지 걸었다. 원래 계획에 없던 긴 시간의 걸음이었다. 걷다 보면 이렇게 마음 내키는대로 발걸음이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의외의 길에서 재미난 풍경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것은 인생길과도 닮았다. 그런 의외성이 있으므로 우리의 인생살이도 재미있고 기대가 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