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오색 물든 덕수궁

샌. 2007. 11. 14. 14:30

이른 퇴근길에 교보문고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나무에 관한 책을 한 권 샀다. 스스로를 '나무에 미친 환자'라고 부르는, 한문을 전공하신 분이 쓴 나무책이었다.

 

그리고 가을 향기에 끌려 덕수궁에 들렀다. 마침 덕수궁에서는 '시와 그림이 있는 오색 물든 덕수궁'이라는 주제로 낙엽길에서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가을을 곁에 두고 홀로 가슴엔 낙엽더미가

쌓였다, 스스로 타버리는 재가 되어

저기 저 벌판에 서있는 외줄기 처연한 사랑이 있습니까?

펼친 시간 허락하시고 비로소 사랑받게 하소서

겨울 오기 전 낙엽 지듯 사랑 또한 진다해도

한 계절 앓느니 한 계절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엔 만나게 하소서

할퀴고 저버려진 가지에는 청록의 싹 움틀 리 없고

미래도 생명도 잃어 가리니 선선히 받아드린 사랑

무너질 때로 무너지더라도 이별의 전주곡은 마소서

한줌 사랑의 엽서 띄우게 하소서

그리하여 다시 가을엔 사랑할 채비하게 하소서

 

- 가을엔 사랑할 채비하게 하소서 / 김윤진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한다요

뭐한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한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한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 들국 / 김용택

 



하늘에서 내린다면 어떨까

짝 잃은 날짐승이 외롭게 울다가 지쳐

땅 위에 뒹군다면 어떨까

볼수록 저것은

슬픈

고독의 그림자

어디서 누군지 목메어 찾고 있을

슬픈 사랑의 이름인지 몰라

몰라

 

- 낙엽 / 조남두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달빛도 기울어진 산마루에

낙엽이 우수수 흩어지는데

산을 넘어 사라지는 너의 긴 그림자

슬픈 그림자를 내 잊지 않으마

언젠가 그 밤도

오늘 밤과 꼭 같은 달밤이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흩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길을 잃은 밤

너는 별을 가리켜 영원을 말하고

나는 검은 머리 베어 목숨처럼 바친

그리움이 있었다 혁명이 있었다

몇 해가 지났다. 자벌레처럼 싫증난 너의 찌푸린 이맛살은

또 하나의 하늘을 찾아

거침없이 떠나는 것이었고

나는 나대로

송피(松皮)처럼 무딘 껍질 밑에

무수한 혈흔(血痕)을남겨야 할

아픔에 견디었다

오늘 밤 이제 온전히 달이 기울고

아침이 밝기 전에 가야 한다는 너

우리들이 부르던 노래 사랑하던 노래를

다시 한 번 부르자

희뿌연히 아침이 다가오는 소리

닭이 울면 이 밤도 사라지려니

어서 저 기울어진 달빛 그늘로

너와 나 낙엽을 밟으며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 가을의 동화(童話) / 홍윤숙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 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 가을날 / 김현성

 



꽃집에서

가을을 팔고 있습니다

가을 연인 같은 갈대와

마른 나뭇가지

그리고 가을 꽃들

가을이 다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가을 바람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대 가슴에도 불고 있지 않나요

가을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

가을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가을을 파는 꽃집으로

다 찾아오세요

가을을 팝니다

원하는 만큼 팔고 있습니다

고독은 덤으로 드리겠습니다

 

- 가을을 파는 꽃집 / 용혜원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落果)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보다

더 빛나는 것이

떠남인 것을,

이 저문 들녘

철새들이 남겨 둔

보금자리가

약속의

훈장이 되게 하소서

 

- 가을의 노래 / 유자효

 



고궁의 처마 끝을 싸고도는

편안한 곡선 하나 가지고 싶다

뽀족한 생각들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닳고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냇가의 돌맹이처럼 둥글고 싶다

지나온 길 문득 돌아보게 되는 순간

부끄러움으로 구겨지지 않는

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아왔던

어리석었던 날들 다 용서하며

날카로운 빗금으로 부딪히는 너를

달래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 넉넉한 마음 / 재진

 



쪽빛 하늘이 드높군요

이 가을 날 내 마음에

남포등을 밝히어

그대를 보내드립니다

우리가 함께한 지난 세월동안

내 울타리 안에

무척이나 그대를 가두고 지냈습니다

이제는

코스모스 환한 웃음으로 마중하는

통일로를 달리며

넉넉한 마음 되어

그대를 잊겠습니다

소슬바람 따라서

장흥으로 달려가

예뫼골 페치카도 만나보며

그대 생각조차 않기로 하겠습니다

그 언젠가처럼

국화 향기 맡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홀가분한 마음 되어

가을날을 벗삼아 걷겠습니다

 

- 가을날을 벗삼아 / 홍경임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작년 이맘때 오른

산마루 옛 城터 바위 모서리

작년처럼 단풍은 붉고

작년처럼

가을 들판은 저물어간다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작년에도 스스로에게 물었던 물음

자꾸만 세상은

저무는 가을 들판으로 눈앞에 떠오르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동안

덧없이 세월만 흘러가고

어이없이 나이만 먹어가건만

아직도 사위어가는 불씨 같은 성화는 남아

까닭 없이 치미는 울화 같은 것

아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저무는 산마루 바위 모서리

또 한 해 불붙은 단풍을 본다

 

- 단풍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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