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보다는
길에서 가고 싶다
톨스토이처럼 한겨울 오후 여든두 살 몸에 배낭 메고
양편에 침엽수들 눈을 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눈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 기차역에 나가겠다가 아니라
마지막 쑥부쟁이 얼굴 몇 남은 길섶
아치형으로 허리 휘어 흐르는 강물
가을이 아무리 깊어도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뼝대
그 앞에 멎어 있는 어슬어슬 세상
어슬어슬, 아 이게 시간의 속마음!
예수도 미륵도 매운탕집도 없는 시간 속을
캄캄해질 때까지 마냥 걸어
- 집보다는 길에서 / 황동규
인생의 나이가 가을 쯤되면길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지.
살면서 써야 했던 온갖 가면들 벗어놓고, 가벼운 배낭 하나에 몸 맡기며, 어슬어슬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거지.
거기서 무얼 만나고픈 기대도 없이, 돌아갈 기약도 없이, 낯선 길을 마냥 걷고만 싶은 거지.
쓸쓸해서 오히려 편안한, 그 길 위에서 저녁을 맞고 싶은 거지.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 / 김초혜 (0) | 2006.11.17 |
---|---|
다시 떠나는 날 / 도종환 (0) | 2006.11.13 |
담장 고치기 / 로버트 프로스트 (0) | 2006.10.31 |
낙엽은 / 박민수 (0) | 2006.10.25 |
집오리는 새다 / 정일근 (0) | 2006.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