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집보다는 길에서 / 황동규

샌. 2006. 11. 6. 15:44

집보다는

길에서 가고 싶다

톨스토이처럼 한겨울 오후 여든두 살 몸에 배낭 메고

양편에 침엽수들 눈을 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눈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 기차역에 나가겠다가 아니라

마지막 쑥부쟁이 얼굴 몇 남은 길섶

아치형으로 허리 휘어 흐르는 강물

가을이 아무리 깊어도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뼝대

그 앞에 멎어 있는 어슬어슬 세상

어슬어슬, 아 이게 시간의 속마음!

예수도 미륵도 매운탕집도 없는 시간 속을

캄캄해질 때까지 마냥 걸어

 

- 집보다는 길에서 / 황동규

 

인생의 나이가 가을 쯤되면길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지.

살면서 써야 했던 온갖 가면들 벗어놓고, 가벼운 배낭 하나에 몸 맡기며, 어슬어슬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거지.

거기서 무얼 만나고픈 기대도 없이, 돌아갈 기약도 없이, 낯선 길을 마냥 걷고만 싶은 거지.

 

쓸쓸해서 오히려 편안한, 그 길 위에서 저녁을 맞고 싶은 거지.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 / 김초혜  (0) 2006.11.17
다시 떠나는 날 / 도종환  (0) 2006.11.13
담장 고치기 / 로버트 프로스트  (0) 2006.10.31
낙엽은 / 박민수  (0) 2006.10.25
집오리는 새다 / 정일근  (0) 2006.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