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분단시대의 올바른 인식

샌. 2006. 9. 28. 11:52

교양강좌 두 번째는 강정구 교수님을 초대하여 얘기를 들었다. 강 교수님은 지난해에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 한창일 때 ‘6.25는 통일전쟁’이라고 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고, 대학 측에서는 직위해제 시켜 지금은 강의를 할 수 없는 처지다. 그 사건의 과정은 우리 사회 및 국민의식을 보여준 대표적인 것이었다. 토론과 논의를 통해 충분히 의견 수렴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의 성역은 역시 신성불가침임을 증명해 보였다. 진실을 찾는 학문의 영역에서조차 우리 사회는 아직 두터운 터부의 장막을 쳐놓고 있다. 주장의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한 인간의 사상의 자유를, 그리고 학문을 통한 논쟁조차 금기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서로 다른 견해가 충돌할 때 드러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의 생각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생각을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고 한 볼테르의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성역 깨뜨리기에 나선 교수님의 용기가 강의를 들으며 점점 진하게 다가왔다. 필화사건으로 불리는 논란은 지난 여름 인터넷 신문에 실린 칼럼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서 강 교수는 미국을 해방자가 아니라 침략자로, 맥아더를 생명의 은인이 아닌 전쟁광임을 밝히면서 6.25전쟁을 북한 지도부에 의한 통일전쟁으로 규정했다. 여기에 대한 찬반 논란은 당연한 것이고, 반대쪽 또한 충분한 논리적 근거가 있을 것이다. 사회통념상 위험한 발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빨갱이로몰고 감옥에 넣으려는 위험한 흑백논리에 갇히는 것이다. 사실과 진실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강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한국의 현대사는 사실 왜곡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냉전분단체제에 의한 오염으로 냉전 성역(북방한계선 문제, 맥아더동상 철거 논란 등). 한미동맹을 철칙으로 받아들이는 미국중심 역사관(미군기지 오염 문제, 자이툰 파병 등). 북의 발생적 결정론과 남의 몰역사적 결과론.


해방 후 남쪽에서 친일 청산[구조 바꿈, 사람 바꿈]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 진보적 역사이행이 좌절된 주원인이다. 학계, 군, 경찰 요직을 친일파들이 장악했다. 3년간 나치 지배를 받은 프랑스는 전쟁 후 수만 명을 처형했지만, 우리나라는 공식 처형이 한 명도 없었다. 당시 민족사적 핵심 과제는 식민지잔재 청산, 민족통일정부 수립, 민족자주 구현, 민주주의의 구현,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민중권익의 구현이었는데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방공간은 진보적, 사회주의적 지향의 성격이 강했다. 미군정청 여론조사 및 조선신문기자협회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회주의-공산주의 지지 70%, 자본주의 14%였고, 정권형태는 인민위원회가 71%로 압도적이었고, 국호도 조선인민공화국 70%, 대한민국 24%였다. 세계사적 조류도 그랬지만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컸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2.7 구국투쟁으로 한국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6.25에 의해 한국 보수지배 체제가 정착되고 진보 세력은 소멸된다. 그리고 5.18 항쟁 이후 진보진영이 재등장한다.


학문의 기본은 참과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즉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학문 앞에 성역은 있을 수 없다. 성역이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도전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불가침 영역을 말한다. 한국사회는 분단과 냉전으로 인해 생긴 냉전성역이 지배하고 있다. 현대사에서 북한 관계 부문, 평화와 통일 분야에 가장 많은 성역이 존재한다. 냉전성역의 특징은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냉전성역을 허물어야 한다. 지난해의 필화사건도 냉전성역 허물기의 일환이다.


6.25 통일전쟁론도 침략전쟁이라는 표준정답에 대한 도전이므로 필화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전쟁은 주체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성격 규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침략전쟁이라는 것은 국내외법적으로 어떤 근거도 없다. 침략이란 별개의 주권국가 사이에 일어나는 것인데 당시 북한은 국가 승인도 받지 못한 임의단체에 불과했다. UN에서도 단순히 평화파괴행위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국내법적으로도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규정했으므로 침략행위가 성립되지 않는다.


남한 이승만의 자본주의를 위한 북진통일론은 통일전쟁이지만, 북의 김일성 주도의 사회주의 통일을 위한 전쟁은 통일전쟁으로 규정하지 못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베트남 역시 아직 통일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또 분단 60년이 되는 2005년을 주한미군 철수의 원년으로 삼자는 주장은 북한의 주장에 동조, 찬양한 것이 아니다. 북의 발표 전에 주장한 것이므로 찬양-고무죄로 처벌하려는 것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등치시킨 것이다. 그것을 떠나 찬양-고무나 국보법상 이적행위라는 사법적 잣대의 학문세계 개입은 원천적인 학문 침해 행위이다.


그러나 필화사건을 야기한 주요인은 우리 의식의 북한-미국 예외주의다. 북한은 실제가 웃는 얼굴이라도 악마나 일그러진 얼굴로 그려야 한다. 반면에 미국은 실제의 악마 모습도 천사 얼굴로 그려진다.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신사참배에 대한 반일, 고문서 미반환에 대한 반불, 동북공정에 대한 반중은 괜찮은데 왜 미국 비판과 반미만은 안 되는가? 이런 반보편적인 미국 예외주의가 우리의 현실이다.


북한에 일률적인 인권 문제 거론도 문제가 많다. 국제 규약에 따른 인권의 개념은 사회경제권과 자유시민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가 사회주의식 인권 개념이라면, 후자는 자본주의식 인권 개념이다. 미국은 아직 사회경제권에는 비준을 안 하고 있다. 규약에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인권은 생명평화권이다. 인간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생명권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는 바로 미국이다. 냉전기의 3번의 전쟁 위기, 탈냉전기의 8번의 전쟁 위기, 그리고 부시 집권 후의 전쟁 위기는 대부분 미국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북한은 70년대 이후 계속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불가침조약을 비롯해 평화협정을 지속적으로 거절하고 있다. 이런 미국은 북한 인권을 거론할 자격이 없다. 북한인권법이란 인권을 빌미로 북한 붕괴시키려는 법에 불과하다.


남북의 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남쪽 군사력이 월등히 우세하다. 2005년 북한 군사비는 17-8억대, 남한은 200억 달러이다. 경제력의 격차는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경제난으로 제대로 된 훈련조차 못하고 있다. 정보력 또한 남한에 훨씬 뒤진다. 북한에 의한 전쟁 위협론은 진실이 아닌 가공의 상상체일 뿐이다.


주한미군이 한반도 평화의 진정한 지킴이인지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우리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객관적 실체로서의 있는 그대로의 북한과 미국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통일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2030년대가 되면 중국의 중화민족주의와 미국단일 패권주의가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미-소간의 동서냉전 때와 같이 통일은 불가능해지고 전쟁까지도 발생할 수 있다. 동북아 신냉전 성립 이전에 부분통일이라고 이루어져 지구촌에 한반도 통일을 기정사실화 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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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지난해에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실렸던 강 교수의 칼럼이다.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


지금 인천 만민공원에는(자유공원은 한국전쟁 후 만병통치 같은 ‘자유’라는 말의 범람으로 바뀐 이름임) 맥아더동상 허물기 쪽과 지키기 쪽 사이에 공방이 치열하다.


앞쪽 사람들은 으레 그렇듯이 우리 민족고유의 옷이나 생활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 민족에 대한 아련하고 애틋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지만 뒤쪽 사람들은 군복과 훈장 또 미국 국기인 성조기 등으로 치장한 차림이 많아 마치 세계만방을 휘젓고 다니는 미국 군인과 같다. 그래서 뭔가 무시무시한 전쟁사태가 터질 것 같은 공포감을 불러온다.


이러한 겉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듯 7월 17일 공원에서 양측의 충돌은 뒤쪽이 앞쪽을 일방적인 힘으로 몰아붙이려는 짐승몰이 작전을 연출하는 듯 했다. 글쎄 지금이 어느 땐데 이 동상 공방이 폭력몰이와 ‘빨갱이’라는 색깔몰이로 결판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어이가 없다.


이제까지 으레 그리 해 왔듯이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합리적 방법일랑 아예 안중에도 없거나 또는 역량이 전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21세기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는 탈냉전 통일시대다. 이제 구태의연한 방식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합리적 논쟁을 통한 자기주장의 관철만이 용납되는 사회임을 제대로 깨닫기 바란다.


다른 한편 확고한 신념에 가득 찬 그들의 겉모습을 보건데 그들 역시 합리적 논리와 근거를 내면 속에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맥아더의 진면목을 들추어내어 이를 바탕으로 맥아더 동상허물기가 너무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이고 합리적 행보임을 피력하겠다. 욕설이나 비방이 아니라 상응하는 차분한 반론을 기대해 본다.


지금 한반도는 936년 고려의 통일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분단된 적은 없다. 후삼국의 분열도 44년으로 이렇게 길지는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도 35년으로 분단 60년에 비하면 반절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다 주한미군이 평택으로 이주하면 최소한 50년은 더 머물겠다하니 이대로 되면 분단이 최소한 110년은 된다는 얘기다.


이 민족비극의 원조인 38선은 미국이 이미 45년 7월 중에 계획을 세웠고 최종 획정은 8월 11일 러스크라는 중령이 미 국무성 한 구석에서 지도로 확정지었다. 우리 조선사람 누구와도 상의 한마디 없이 또 연합국 누구와도 상의 없이 독단으로 결정했다. 베트남 역시 16도 선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리적 분단을 결정하고 자행했다.


이 결정을 바로 집행한 당사자가 맥아더이다. 8월 15일 일반명령 1호를 선포해 38선에서 하루아침에 우리의 조국을 두 동강 내어버린 것이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하나 됨을 위한 통일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이 분단집행 집달리를 찬양하는 동상이 아직까지 국제관문인 인천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또 1998년 인천청소년 여론조사에서 이 분단 집달리는 20%의 지지를 얻어 인천의 대표 인물 1위를 기록했다. 마치 우리가 분단을 기리고 즐기는 것으로 비쳐지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맥아더를 많은 남쪽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짝 사랑하고 있다. 점령 당시 만약 맥아더가 조선 사람들을 사랑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배려했더라면 점령군사령관으로서 아마 다음과 같은 포고문은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표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교란케 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All persons will obey promptly all my orders and orders issued under my authority. Acts of resistance to the occupying forces or any acts which may disturb public peace and safety will be punished severely).


제5조 군정기간에(during the military control은 ‘군사점령기간’이 정확한 번역임) 있어서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하거나 부동할 때는 영어 원문을 기본으로 한다.


완전히 식민지총독 부임과 같은 서슬 퍼런 모습으로 점령군의 면모를 한껏 발휘했다. 이런 맥아더와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조선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조선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려 있다. ... 조선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노중선 편, 『민족과 통일 1』108, 105).


첫 포고문에서 드러난 이러한 차이가 이후 점령정책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미국 군사정부를 통해 조선을 직접 통치하려 했고 이 결과 바로 군사정부가 수립되어 직접적인 점령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소련은 자기들이 직접통치행위를 책임지는 군사정부가 아니라 조선인자치정부 성격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인 점령정책을 펴나갔다.


미군이 직접적인 군사통치를 자행한 남쪽은 점령 3년 동안 1946년의 대구 10월항쟁, 1948년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등 인민항쟁과 야산대와 유격대 투쟁 등 수많은 항쟁과 전투와 폭동의 연속이었다. 이 결과 1950년 6·25전쟁 직전까지 무려 10만 명의 희생이 발생했다. 곧 이미 한국전쟁의 시발인 작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반면에 간접적인 점령정책과 조선인에 의한 자치정부를 시행한 북쪽에서는 이런 진통과 혼란이 없이 안정을 누렸으며 친일청산과 대대적인 사회경제개혁이 이뤄져 친일파가 더욱 기성을 부린 남쪽과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이래도 미국과 맥아더가 조선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고 어쩌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맥아더동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 같다.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강제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38선의 지리적 분단에서부터 신탁파동의 이념적 분단, 5·10단정단선의 정치적 분단 등을 주조하고 강요했다. 그렇지만 이는 국내세력의 동원이나 협력이 없이 이뤄지기는 힘들다.


바로 이 분단비호 국내세력은 일본식민지의 군, 경찰, 관리 짓을 한 김창룡, 노덕술, 최규하 등의 친일민족반역관료세력과 미군정의 여당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성수, 조병옥, 송진우, 장덕수 등이 주도한 한국민주당과 같은 친일정치세력 두 부류였다.


바로 이 두 분단 국내비호세력인 정치-관료 친일세력의 대부가 이승만이었다. 이 이승만을 권좌에 올리는 데 초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 맥아더였다. 그는 미 국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상해임정의 김구나 다른 민족인사들보다 먼저 군용기편으로 한국에 데려와 이승만 영웅 만들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더 나아가 대만의 장개석과 연대해 맥아더-장개석-이승만 동북아파시스트 연결망을 형성해 중국본토 탈환을 노리고 소련에 대한 봉쇄나 격파의 첨병을 자원하고 자행했다. 이런 기조가 6·25전쟁에서 이 전선을 중국과 소련까지 확장시켜 3차 대전까지 몰고 가려는 과대망상을 하는 전쟁광의 형태로 나타났다.


세계사적으로는 탈냉전의 평화와 인권시대, 민족사적으로는 통일시대를 맞은 이 시점에서 우리 민족은 말할 나위없고 인류 전체에 대재앙을 가져올 3차 세계대전을 꾀하는 이런 전쟁광과 ‘인류의 적’을 기리는 동상이 유지되는 것은 인류에 대한 모독은 아닌지 반문해 봐야 할 것이다.


흔히들 미국과 맥아더를 6·25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고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한다. 그래서 이 고마운 은인인 미국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보은론이 판을 치고 미국을 비판만 해도 ‘배은망덕’ 한다고 질타한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인천지구 황해도민회 류청영 회장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맥아더를 '구세주'라고 하면서 "만일 맥아더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이 CNN 방송에라도 나가면 우리는 배은망덕한 민족으로 취급 받는다"고 까지 했다 한다.


이러한 은인론 이야기만 나오면 미국과 주한미군의 온갖 만행과 제국주의성을 성토하다가도 사람들은 뒷걸음질 치고 비판적 예봉이 꺾이고 만다. 그야말로 이 은인론과 보은론은 저격수의 역할을 십분 발휘해 오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이 만병통치 같은 대미 생명은인론과 보은론에 덜미가 잡히고 주눅이 들어야 하나? 또 정말 이들이 논거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은인이기 보다 생명을 앗아간 박탈자가 아닌가? 언제까지 이런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의 포로가 되어야 하는가? 이제는 냉엄하게 되물어야 할 시점이다.


여기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자는 누구인가? 분명한 것은 전쟁전후에 전사한 약 200만 명, 학살당한 약 100여만 명, 중국군 약 90만 명, 미군 등 5만~6만 명, 곧 전쟁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한 약 400만 명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


오히려 이들 대부분에게는, 미국이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일 것이다. 왜냐면 만약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는 아무리 많아야 남북한 합쳐 1만 명 미만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약 3백 99만 명이 더 많이 죽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렇게 미국의 전쟁개입으로 남북은 거의 전체 인구 10%인 300만이 죽음을 당했고, 중국은 90만, 미국 등은 5만~6만이 죽음을 당했다. 이런데도 미국을 생명의 은인으로 규정짓는 것은 허구일 뿐 아니라 죽은 자 대부분을 두 번 죽이는 것과 진배없다. 실재 전쟁과정에서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낸 주된 장본인은 커밍스가 잘 지적한 대로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었고 이승만 정부의 체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를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한 일이다. 그는 1·4후퇴 당시인 1950년 11~12월 전선이 37도선으로 후퇴하자 중국과 북한에 26개의 원자탄을 투하해 코발트 사선을 형성하고는 중국과 전면전으로 전쟁을 확장하려했다. 실재 미국은 허드슨 작전이란 모의 원자탄 실험을 북한 상공에서 실시해 이런 맥아더의 구상이 실현될 수도 있었다.


그 당시 원자탄 투하설은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남쪽으로 넘어 왔다. 다행히 영국 등 세계 여론이 들끓어 위기는 모면했지만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시점까지도 미국은 원자탄 투하 위협을 지속해 왔었다.


만약 맥아더의 작전대로 원자탄이 투하됐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보자. 이는 필연적으로 소련의 개입과 3차 대전으로 직결됐을 것이다. 아예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반도와 민족의 역사종말일 것이다.


설사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다하더라도 한반도의 결과는 뻔하다. 남북이 통틀어 불모지대가 되고 남이든 북이든 나라라는 명맥을 잇기도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남북인구 3천만 중에 몇 백만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아마 구세주니 배은망덕이니 주장하는 나이든 사람들은 아예 지금까지 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그들이 ‘구세주’로 모시는 바로 그 당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데도 생명은인이라고 동상을 세우고, 또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금지야 옥지야 껴안고 있어야겠다고 폭력몰이와 색깔몰이까지 벌리는 판이니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는 것 같다.


6 ·25전쟁 초기 남한 땅에서의 미군 민간인학살은 노근리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었다.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진주 출신의 어느 ㄱ 국립대교수의 전쟁체험담을 들어보자. 전쟁 초기 그의 가족은 어느 초등학교에 머물렀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비행기 두 대가 그 초등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했다.


그래서 인근 지역인 의령으로 긴급히 피난지를 옮겨 다시 그 지역의 어느 초등학교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미군 비행기가 초등학교를 사격해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곳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산골에서도 집이 쉽게 노출되는 지역은 곧 바로 미군비행기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산골짜기의 외딴집에 피신하여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1999년 10월 27일 필자와의 면담).


이러한 전쟁 체험은 미군비행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특수한 조건에서 특수하게 이루어졌다기보다는 6·25전쟁 초기 남한 땅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미군의 민간인학살에 대해서는 “공산당을 혐오와 불신으로” 묘사해왔던 뉴욕타임스 대구특파원까지도 시인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공산당이 그들의 고향과 학교를 세워둔 채로 퇴각한 반면, 가공할 무기로 싸우는 유엔군이 일단 주둔했던 도시는 까맣게 하고(초토화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공산당은 심지어 퇴각 중에도 도덕적인 승리를 기록했다(‘뉴욕타임스’, 1951년 2월 21일자; I. F. Stone, '비사 한국전쟁', 신학문사, 1988, 276쪽에서 다시 옮김).


노근리 학살사건도 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19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 황간면 노근리의 민간인을 학살한 쌍굴학살 사건의 진상규명 관계자이고 피해당사자인 정은용의 진술은 전쟁 중 미군의 남한 내 민간인학살에 대한 조직성, 공식성, 비우발성, 명령성, 체계성, 범죄성 등을 잘 말해 준다.


그들이 피난시켜 주겠다고 동네 사람들을 목적의식적으로 모은 점, 폭격기와 공동작전을 펼친 점, 굴다리에서 사흘 간 계속 총질을 해댄 점 등을 볼 때... 그래서 현장의 미군이 말했다는 것처럼 미군은 실제로 ‘의심나는 피난민은 모두 죽여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피난민 조사를 통해 그들은 비무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살인을 계속한 것은 대전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과 피난민을 살려 둘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일단 ‘학살’을 시작했으니 ‘전멸’시켜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오연호, 1994:44; 정은용, 1994).


이러한 정은용의 추론은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래의 99년 9월 30일자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이를 확인했다.


◇ 1950년 7월24일 미 1기갑사단 명령(당일 오전 10시 휘하 8기갑 연대 통신문): 피난민이 (방어)전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라. 넘으려 하면 그가 누구든 발포하라. 여자와 어린이의 경우 분별력 있게 대처하라.

◇ 7월26일 아침 미 8군 본부 통신명령: 반복하지 않겠다. 언제 어떤 피난민도 전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마라.

◇ 7월26일 미 보병 25사단 통신문: 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은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발포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 7월27일 미 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재차) 명령: (남한 양민들은 한국 경찰에 의해 전투지역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전투지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에 따른 조처를 취할 것이다.


이렇게 미군의 민간인학살이 상부의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공식문서로 재확인됨에 따라 전국 여러 곳에서(2000년 말 현재 약 60여 곳) 유사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청과 증언이 쇄도하였다.


경북고령군 고령교 피난민 다수사상,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약 300명 사망, 경북 울릉군 독도 150명 사망, 충북 예천군 보문면 신성리 약 50명 사망, 충북 예천군 판교면 판교리 10명 사망, 충북 영동군 황간면 121명 사망, 전북 익산군 익산면 이리역 54명 사망, 경북 구미 형곡동 100명 사망, 경북 의성군 금성면 17명, 경북 칠곡군 외관읍 외관교 폭파 피난민 다수 사상, 경북 포항시 60명, 경남 함안군 군북면 30명 사망,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30명, 경남 사천시 곤명면 50명 사망, 경남 마산시 진전면 83명 사망, 경남 창녕군 창녕읍 초막춘 80명 사망 등이다.


이러한 민간인 무차별 기총사격은 미국이 2000년 6월 5일 보도한 미 육군조사단이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미 공군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터너 로저스 공군 대령이 남긴 이 기록은 “육군은 아군 진지로 접근해오는 모든 민간인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며…지금까지 우리는 이에 부응해왔다"고 적고 있다한다. 육군은 "북한군들로 이뤄졌거나 혹은 북한군이 통제하는 대규모 민간인들이 미군 진영에 침투하고 있다"며 민간인 사격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는 전했다(한겨레신문, 2000.6.7).


미국의 민간인학살은 적과의 전투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발생하거나, 결코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실수나 순간적인 판단착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노근리사건에서 확인되었듯이 사단장의 작전명령과 같은 공식적 지휘계통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 지휘계통의 최고책임자는 구세주라고 일컬어지는 맥아더였다. 이 학살에 대한 정보보고를 수없이 받았을 텐데 그는 이에 대한 강력한 근절 또는 시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적과 아를 구분할 수 없었기에 불가피했다고 미국과 맥아더 편을 든다. 그러나 당시 참전했던 중국 인민해방군들에게도 조선사람 가운데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강간, 학살만행 등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변명으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맥아더의 책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7월 초에 그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공식적으로 이양 받았다. 한반도 내 일어나는 모든 군사행위는 그의 권위 하에 이뤄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그는 모든 일들에 대한 궁극적 책임자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미군은 한국군의 대대 급까지 미 군사고문관을 파견하고 작전권을 행사해 왔었다.


그의 지휘체계 하에 일어난 첫 번째 한국정부의 민간인 대량학살은 7월 중순 평택이하부터 자행된 20만 안팎의 보도연맹원 학살이었고 대전형무소 수감자 1800명의 학살이었다. 여러 사진에서 확인되듯이 미군의 목격 하에 이뤄졌다. 이 같은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첫 단추에도 불구하고 최고책임자인 맥아더는 이 학살만행을 묵인 내지 외면했다. 이 결과 형무소 수감자 수만 명의 추가 학살이 전개되고 이후 줄줄이 이어져 약 1백만의 민간인이 이승만 정부 하에 학살당했다.


물론 그의 임기 중에 발생한 이승만 정부의 민간학살에 대한 궁극적 책임도 그의 몫이다. 원자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것만으로도 그는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엄연히 학살만행의 궁극적 책임자로서 전쟁범죄자다. 범죄자의 동상을 만들고 이를 기리는 현상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또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제 보은론을 본질적으로 따져보자. 만약 미국과 맥아더가 자기들 멋대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두 동강 내지 않았다면 우리가 민족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과 형극을 겪었을까? 만약 6·25라는 통일내전에 외국군인 미국이 사흘 만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전쟁피해가 일어났으며 지금까지 분단되는 비극이 지속될까?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물론 외세가 기원한 내전). 곧 당시 외국군이 한반도에 없었기에 집안싸움이었다. 곧 후삼국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삼한통일의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


우리 역사 책 어느 곳에서도 왕건이나 견훤을 침략자로 매도하지 않고 오히려 왕건을 통일대업을 이룬 위대한 왕으로 추앙한다. 그런데 이 같은 성격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외세인 미국이 사흘 만에 개입해 전쟁주체가 된 셈이다. 만약 집안싸움인 이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테고, 물론 우리가 실재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 사흘만인 27일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미국정부에 개입을 요구하고, 곧바로 소사 등에 폭격을 감행한 전쟁광이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없었다면 민족의 분단과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곧, 커밍스가 논증한 대로 분단과 전쟁의 기원은 바로 미국에 귀착된다. 그야말로 미국이라는 존재는 보은론과는 정반대로 우리에게 비극과 질곡, 전쟁, 지난 6월전쟁위기설과 같이 오늘날 까지 지속되는 한반도 전쟁위기를 몰고 왔고 또 몰아오고 있는 주범인 것이다. 여기에 맥아더는 그 첨병의 역할을 초기에 집행한 집달리인 셈이다.


극소수 인명 살상에 그쳤을 6·25 확대내전에 그토록 많은 살상과 파괴가 미국 때문에 일어난 것을 보면 미국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다. 원수를 은인으로 보는 이런 역사왜곡, 곧 대미 보은론은 이제 탈냉전통일시대를 맞아 완전히 폐기돼야 한다. 물론 맥아더 동상도 함께 역사 속으로 던져버려야 한다.


설사 보은론이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보은론은 그 유효성을 상실한다. 왜냐면 은혜는 한번 갚으면 되었지 영원히 갚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1958년 정전협정 무기반입금지조항을 폐기시키고 남한 땅에 무려 600~1300기에 이르는 핵무기를 배치해 한반도는 34년 동안 세계에서 남의 핵무기가 가장 많이 배치된 나라였다.


이 핵무기는 이북과 함께 소련을 주로 겨냥한 것이다. 이는 미·소전쟁의 경우 바로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 이전에 이곳 남한이 소련의 주공격목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평론가 김성전에 의하면 이는 결과적으로 한반도가 볼모로 잡혀 미국 국민의 안전을 높여 준 꼴이 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는 갚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고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감이다.


더 나아가 베트남 파병, 천문학적인 미국의 첨단무기 구입으로 인한 미국 퍼주기, 해마다 15억 달러 수준의 주한미군 주둔비 지원, 한반도문제의 한국군화로 무용지물의 미군 주둔 등으로 갚은 정도가 아니라 이미 수십 갑절 갚고도 남은 셈이다.


맥아더는 1·4후퇴 뒤 일개 군 사령관 주제에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휴전 논의를 한마디 상부와 논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피력했다. 이는 대통령의 권한까지 월권하는 것으로 간주돼 대통령 트루만에 의해 전격 해임 당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한껏 영웅시 되었던 맥아더가 전격 해임되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미국 의회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연설을 했을 때 미국국민들은 그를 마치 신화 속의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평소에도 그는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미 합참 상급자, 국방부·국무부장관, 대통령까지도 무시하면서 독단적 전쟁 수행권을 행사하려한 과대 망상적 영웅주의자였다. 그리고 그의 허황된 꿈은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었다. 미국 의회에서의 마지막 연설을 계기로 그의 꿈은 그대로 실현되는 듯 했다.


전쟁영웅으로 최상의 추앙을 받았지만 맥아더관련 상원청문회에 증인으로 나타난 맥아더는 당시의 국무장관 에치슨과 국방장관 마샬 등과의 대립신문이나 논쟁에서 그야말로 아예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패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허풍쟁이 전쟁영웅으로 그의 평판은 둔갑해 그는 이후 미국사회에서 완전 추락한 날개에 불과했다.


개인적으로도 그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과대망상을 의회청문회 이후 일거에 날려버린 허무한 인생을 마무리 한 사람이다.


부끄럽게도 이 추락한 맥아더는 오직 이곳 남한 땅에서만 아직도 웅대한 동상으로 위용을 보여주면서 죽어서도 역사를 왜곡하고 오염시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


아직도 맥아더의 허물 속에 갇혀 냉전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를 넘어서고 또 이 허울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는 평화와 통일의 길을 굳건히 축성하는 데에 우리 모두 함께 나서야 할 때이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탄식과 분노를 분단 60년 오늘의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군주둔연장을 자기네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지각한 도배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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