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이 시대를 사는 고민

샌. 2006. 9. 19. 09:28

전교조에서 주최하는 교양강좌를 신청했다.

지난주에 홍세화 님을 초대한 첫 번째 강좌가 있었다. ‘한국 사회의 진보와 자아실현’이라는 제목으로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강좌는 무척 유익하고 의미 있었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 극복 방안을 함께 고민해 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메모한 내용을 중심으로 강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우리 사회는 20 대 80의 사회라 불린다. 상위 20%가 부의 80%를 독점하고 있는 양극화 사회다. 양극화의 정도는 미국, 멕시코와 함께 OECD 국가 중에서도 심각한 편에 속한다. 문제는 소외된 80%에 속하는 사람들의 의식이다. 지배집단은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사회 구성원들에게 노예적 의식을 주입시켰다. 일제시대에는 황국신민화가, 해방 후에는 반공안보가, 최근에 들어서는 국익과 경쟁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중은 마취되어 있다. 지배계급에 스스로 복종하는 이러한 의식을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즉 자기배반의식이다. 칼 마르크스는 두 가지 명제를 제시했다. ‘첫째,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둘째,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첫째 명제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지배계급으로 이념화된 대중이 있을 뿐이다. 그람시는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사람들을 지배하는 이런 지배계급의 이념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인간 의식의 특징 중 하나는 고집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화다. 사람들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조차 무지와 헤게모니 작동에 의해 고집한다는 데 있다. 진보가 느린 까닭이 이 때문이며, 진보가 불편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진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느린 것이며, 고집하는 의식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고집은 쉼 없는 회의와 성찰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이때의 이성은 도구적 이성일 뿐이다. 자기배반의식은 합리화에 의해 더욱 공고해진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이다. 다른 무엇도 이것보다 상위의 가치는 없다. 삶은 몸과 의식(가치관)으로 되어 있는데, 몸은 상태이고 의식은 지향이다. 두 가지가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인들은 몸에는 절대적 관심을 나타내지만 의식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천박한 자본주의는 여기서 출발한다. 세계에서 한두 째를 다투는 보신문화와 형편없는 독서량이 이것을 나타낸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상류층의 천박한 문화적 소양과 무딘 예술적 감수성은 절망적이다. 몸에 병이 들면 자각증상에 의해 누구나 알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자각증상이 없다. 자신의 의식을 바로 세우고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늘 비판의 여과망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의식세계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겠다. 외부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의식이 아닌 주체적으로 형성된 의식은 다음 네 가지를 통해서 얻어진다. 첫째, 폭 넓은 독서. 둘째, 열린 자세의 토론. 셋째, 직접 견문. 넷째, 성찰.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금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세계는 주체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즉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자기배반의식으로 가득한 나라에서 문화국가의 꿈은 신기루이다. 오직 성찰과 비판을 통해서만이 이런 노예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중들은 아무런 민주적 통제 없이 이런 노예의식을 심어주는 사회화 과정에 노출되어 세뇌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국가권력에 의한 교육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에 의한 대중미디어이다. 대중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동적으로 자기배반의식을 가지게 되고, 지배층에 대해 자발적 복종의식을 갖게 된다. 가정과 학교 교육이 중요하고 부모와 교사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대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물신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다.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며, 소유가 존재를 결정하는 나라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소유에만 관심이 있을 뿐, 존재에 대해서는 별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길보다 경제동물로서의 길을 가게 된다. 물질에 의한 가치 평가, 그리고 남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는 타자 지향적이다. 인간으로서의 가치에 대한 질문은 설 자리가 없다.


‘대한민국 1퍼센트’라는 말을 들어도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별로 분노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99퍼센트는 1퍼센트를 선망하고 인정한다. 20 대 80이 아니라 1 대 99의 사회까지도 받아들일 자세가 된 듯하다. 이제는 더 노골적으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와 물질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위하는 것일 때만이 의미가 있다. 물신에 포섭되고 오염되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아예 생각도 못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대학의 풍경도 이미 그런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대학을 ‘산업’이라 부르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 같은 구호가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다. 이런 물신주의, 물신 지배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항체가 없다는 점, 그리고 사회문화적 소양이 너무나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 유럽에서 돌아왔을 때 나의 충격이었다.


이미 한국사회도 계층 구조가 견고해졌다.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상승욕구의 꿈을 꾸지만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이럴 때 서민들이 매달리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로또, 사교육, 드라마 중독이다. 도박은 서민들의 돈을 뺏어갈 뿐이고, 사교육에 아무리 투자해도 상류층을 당해내지는 못한다. 고작 드라마를 통해 대리만족으로 자신의 처지를 잊는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아무리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긴장함으로써 자아실현의 끈을 절대로 놓지 않아야 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기 위하여, 인간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고,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궁극적인 길은 그 사회에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자아실현은 위한 두 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튼튼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자본주의는 생존 앞에 자아실현을 양보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아무리 야무지게 내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 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서 자아실현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러나 끝가지 포기하거나 단념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끊임없는 자기성숙에 대한 모색이다. 한국사회는 자기성숙에 대한 모색이 죽은 사회다. 대학 들어갈 때와 취직할 때 외에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 자아실현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성숙을 모색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결국 이 두 가지, 물신에 대한 저항과 자기성숙의 모색을 포기하지 않을 때 자아를 실현하면서 생존을 담보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끊임없이 비교 당하고, 돈과 지위가 일상을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나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한 인간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칫 나르시시즘으로 빠질 위험도 있지만 그러나 모두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다. 자기 성찰을 끊임없이 해 나갈 때 나 자신의 인간적 가치에 대한 최종 평가자는 바로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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