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펌] 행복은 이미 충분하다

샌. 2006. 9. 26. 11:47

어떤 한 경계에서 가슴 시린 쓰라린 아픔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공만을 바라고 바라는 대로 잘 되어지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겠지만, 사실 늘상 성공만 하고 바라는 바대로 이루기만 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내면의 뜰은 공허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실패 속에서 또 그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그 속에서 더 강인해 질 수 있을 것이고, 바라는 바가 좌절되어지는 그 속에서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지혜로움이 생겨나며, 세상을 얕보지 않을 수 있고 좀 더 겸손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가를 가르치는 분이라거나 몸 다스리는 법에 대해 강의하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 분들 비슷한 공통점이 어렸을 때 죽고 싶을 만큼 몸이 너무 허약했다고들 그래요. 너무 몸이 약하고 병이 많다보니 건강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고 그랬으 니 제 몸 죽어나지 않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겠습니까.

제 몸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라거나, 운동이라거나, 요가라거나 아무리 얘기를 해 줘도 나 몰라라 하지 죽기 살기로 뛰어들어 공부할 수가 없어요. 뭐, 당연한 일이지요.

한 번 아파 본 사람만이 그것을 두 번 다시 경험하지 않으려고 정말이지 피나는 노력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에는 생각지 못하게 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고 능통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취직 할 때도 쉽게 쉽게 좋은 직장 취직 잘 한 사람은 직장 고마운 줄 잘 모릅니다. 그러니 그만큼 열심히 일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한 1년이고 2년이고 백수 백조로 있다가 실업자로 논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눈치 보이고 어려운지 충분히 경험했다가 어렵게 어렵게 취직한 사람은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즐겁게 열심히 일합니다.

어지간히 어려운 일, 치사한 일이 있어도 꾹꾹 참고 견딜 수 있는 힘도 생기고 일 그만두지 않으려고, 집에서 논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잘 아니까 회 사에서 힘겨운 일이나, 답답한 일이 생겨도 어지간하면 뛰쳐나올 생각 않고 최선을 다한단 말입니다. 제가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 만나다 보니까 여러 번 보아온 일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었다거나 주식 투자해서 대박이 났다거나 그랬을 때 당장엔 이 경계가 '행복'이라고 느끼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 번 노력도 안 하고 큰 돈을 만져 본 사람은 절대 소박하고 정직하게 작은 돈 벌면서 살 수가 없어요. 수십억 수백억을 쉽게 벌었다면 분명 쓰는 것도 아주 쉽게 쓸 수밖에 없고, 쉽게 쓰는 습을 익혀 놓으면 그게 결국 업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계속해서 요행만 바라지 정직하게 내가 일한 만큼 돈 벌면서 소박하게 살아갈 수가 없어집니다. 어디 몇 백억 쉽게 벌 어 쉽게 막 쓰던 사람이 한달에 일이백만 원씩 받아가면서 정직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처음엔 이 경계가 행복인 줄 알았겠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망쳐놓는 역경계였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또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멀쩡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한테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 가르쳐주고 행복에 이르는, 평화와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을 해도 그리 크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지금도 충분히 행복 하거든요. 그런데 뭐 하러 또 다른 행복을 목숨 걸고 찾겠어요. 물론 수행하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간절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수행도 적당히 하고 시간 있을 때, 마음 내킬 때 적당히 하지 이게 생사를 결단 짓는 중대한 문제라고 여기면서 미친 듯이 달려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 삶의 저 아래 진흙탕에 떨어질 때까지 떨어지고, 괴로울 때까지 괴로워 해 보고,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갈 만큼, 자살하고 싶을 만큼 삶에서 아파하고 괴로워 해 본 사람은 이 가르침이 너를 살려줄 수 있다 하고 이 가르침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하면 정말 죽기 살기로 수행하고 정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실제로 그래요. 너무나도 큰 괴로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죽고 싶을 만큼 아파하는 사람은 불법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하는 그 말을 정말 뼛속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고 온몸을 다 바쳐서 죽기 살기로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 괴로워서 자살하겠다고 어떤 사람이 찾아왔길래, 또 자살밖에 길이 없다고 워낙 확고하게 이야기하길래 기왕에 자살할 꺼면 내 몸 내가 죽이면 그것 큰 죄가 되니까 법당에서 절하다가 엎어져 죽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가만 생각하다가 그러겠노라고 하셨지요.

전 그 분 무슨 철인인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밥 생각도 별로 없고 절만 하시는데 밤도 꼬박 새시면서 절만 하시는데 정말 절하다가 죽으면 어쩌나 걱정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절대 절하다가는 안 죽더라고요. 그렇게 한 며칠을 하시더니만 죽어가야 될 사람이 생기 있는 눈을 뜨고는 이제 가겠다고 해요.

죽으러 가겠다는 말인지 알았는데 살 생각이 생겼노라고 하시면서 돌아가셨지요. 집에 돌아가서 뒷얘기를 들어보니까 매일같이 3000배 이상 절을 하셨다고 그럽니다.

지금은 문제가 다 해결되었어요. 문제 다 해결하고 나 살려준 것이 불법이다 싶어 불교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지난 달인가 짐 다 싸들고 이 밝은 길 따라 출가하겠노라고 오셨더랬습니다. 지금 행자생활 열심히 잘 하고 계실 겁니다.

이 분이 괴로운 역경이 자살하고 싶을 만큼의 괴로운 역경이 없었다면 이렇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겠어요? 아마도 나중에 스님 되시면 훗날 설법하실 때 신도님들께 당신 이야기 절절하게 웃으면서 이야기 하실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은 괴로움을 당해서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은 또 역경 속에 서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더 큰 행복 속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는 삶이라는 게 어때요? 지금 당장 괴로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행복의 밑거름이 되고, 지금 당장 행복인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괴로움의 시작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역경이 곧 순경이고 순경이 곧 역경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역경과 순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았을 때 그 순간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 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역경이다, 순경이다, 혹은 괴로움이다 즐거움이다, 이렇게 나누어 놓는 마음만 없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경계는 그저 분별없는 텅 빈 경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경계들을 죄다 두 가지로 나누어 놓고 어느 하나는 선으로 어느 하나는 악으로, 어느 하나는 행복으로 어느 하나는 괴로움으로, 그래 놓고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만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분별의 참된 지혜의 눈을 가지지 못하고 삐뚤어지고 왜곡되고 치우친 관점만을 지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행복과 불행이 생겨나지요.

이를테면 '건강과 질병' 이렇게 나누어 놓고, 우린 건강하기만을 바라면서 삽니다. 건강하면 좋은 것이고 질병이 걸이면 나쁜 것이라고 분별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질병에 대해서 나쁘다고 분별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 당장에 건강하다고 좋아하면서 안일하게 대처하여 운동도 안하고 몸도 안 돌보게 되면 겉으로는 건강이지만 내적으로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질병을 안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질병이 걸림으로써 몸의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앞으로 더 열심히 운동하고 심신을 단련해야겠다는 것도 알게 되고, 또 내면에 쌓여있던 탁하던 기운들도 한 며칠 앓아누움으로써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게도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질병은 나쁜 것, 건강은 좋은 것, 그렇게 나누어 놓을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질병이 걸리는 것도 좀 더 넓고 지혜로운 시각으로 보면 우리를 공부시키는 것이고, 이끄는 자성불의 나툼인 것입니다.

역경이 처해 봐야 비로소 괴로운 줄 알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되며 그렇게 됨으로써 부처님 가르침을 좀더 바르게 치열하게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게 되었다면 그 역경은 도리어 불법으로 이끌려는 방편 공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계를 가지고 역경이다 순경이다 하겠습니까? 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분별심일 뿐이지 이 법계는 항상 공평하고 여여할 뿐입니다.

나쁠 때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가 가장 좋을 때일 수 있고, 좋을 때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젊어서 뿐 아니라 늙어서도 다 마찬가지지요.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 인생을 값지게 만들어주고 우리 삶에 밑거름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항상 성공만 하고 항상 마음대로 하고 살아온 사람, 실패나 역경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겠습니까.

역경 속에서 수많은 실패 속에서 이겨내고 비틀비틀 쓰러질 듯 하다가도 오뚝이처럼 당차게 일어서면서 세상을 살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내면에 딱 힘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 속에 서도 이겨낼 수 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경계에도 속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그런 내면의 중심이 잡힌 사람이라는 거지요.

한 가지 괴로운 경계가 온다고 했을 때 우린 '괴롭다'고만 생각하지 그 경계의 고마운 점, 이익 되는 점은 보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 분별 하지 말고 오직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지금 현재 법우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즐거우십니까 아니면 괴로우십니까? 일이 잘 풀리는가요, 아니면 잘 안 풀리는가요? 지금의 경계가 역경입니까, 순경입니까?

아닙니다. 역경도 역경이 아니고, 순경도 순경이 아니며, 괴로움도 괴로움이 아니고, 즐거움도 즐거움이 아닌 것입니다.

순역의 양 극단의 분별을 다 놓아버리세요. 다 놓아버리고 내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경계라도 부처님의 나투신 경계로 즐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고마운 공부의 꺼리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없이 자유롭습니다. 역경도 순경도 아니고 다만 여여하고 평등한 하나의 순수한 경계일 뿐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괴로운' 경계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즐거운' 경계 또한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경계는 다만 그러한 경계일 뿐 좋고 나쁜 경계는 아니란 말입니다.

괴로움도 고마운 공부의 재료이고, 즐거움도 고마운 공부의 재료인 것입니다. 역경이든 순경이든 우리 마음속에서 분별해 가지고 행불행을 마음속에 품고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순역의 경계, 즐거움 괴로움의 경계를 다 놓아버리고 무분별로써 일체를 다 받아들이면서 자유롭고 당당한 걸음을 휘적휘적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평화롭습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순간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다 놓아 버리고 나면 지금 이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인 것입니다.


<법상스님>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하는 꿈  (0) 2006.10.08
분단시대의 올바른 인식  (0) 2006.09.28
이 시대를 사는 고민  (0) 2006.09.19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  (0) 2006.09.18
꿈의 해석  (0) 2006.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