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대에는 네 형제분이 계셨다. 선비였던 증조부를 닮으신 분이 장남인 첫째 할아버지셨다. 당시 풍습대로 부모 재산은 대부분 첫째 할아버지가 물려받았다. 동생들은 형님댁 일을 거들어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첫째 할아버지는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고 글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음풍농월하는 양반이었다. 비가 와도 마당에 넌 곡식 하나 거둘 줄 모르는 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남마저 집안 일에 관심이 없고 밖으로 나돌다가 결국은 문전옥답을 비롯한 전 재산을 탕진해 버렸다. 형님 집에서 나오는 삯으로 생활하던 동생네까지 졸지에 집안이 몰락했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할아버지 형제네는 내 땅 한 평 없이 무척 가난한 처지였다. 양반이라는 껍데기만 남았다.
집이 부유하다면 형제간에도 우애가 있지만, 빈곤하게 되면 곡식 몇 되 가지고도 다툼이 일어나고 오해가 생긴다. 심하면 원수가 되기도 한다. 예외인 집안도 있지만 대체로 재물이 없으면 마음마저 좁아진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오는 법이다. 내가 태어날 즈음의 할아버지 형제네도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런데 넷째 할아버지는 일찍부터 유학을 떠나 신식 문물을 접했다. 어떤 과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면장까지 하셨다. 형제들 중에서는 제일 넉넉한 집이었다. 그때 면장이라고 하면 권세를 부릴 만한 자리였다. 그런데 형들은 면장을 하는 동생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다고 한다. 선친은 겨우 국민학교만 나왔을 뿐 학사금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 시절이었다. 양식이 떨어져 몇 끼를 굶은 선친은 용기를 내어 작은아버지 댁을 찾아갔다고 한다. 배가 고파 온 식구가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다고, 쌀 한 줌이라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작은어머니가 매몰차게 돌려세우더란다.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 나오는데 뒤에서 작은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렇게 얻어온 보리쌀로 풀을 뜯어넣고 죽을 끓여 연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넷째 할아버지를 닮아선지 그 집 자녀들은 머리가 뛰어났다. 나에게는 당숙이 되는데 다들 유명 대학을 나오고 교수가 되었다. 그 시절에 미국 유학을 가고 그곳에 정착한 분도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이사를 갔기 때문에 잦은 교류는 없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찾아온 세련된 당숙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공부를 잘하면 저렇게 된다고 해서 나도 얼마나 공부 욕심을 내었는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선대에서는 제일 잘 나간 집안이었다.
둘째 할아버지가 내 직계 할아버지시다. 할아버지에게는 전설 같은 얘기들이 많이 전한다. 증조부께서 아들들을 모아놓고 한문을 가르치려고 하면 우리 할아버지는 도망만 다녔다고 한다. 나중에는 도끼를 들고 들어가 죽어도 공부를 못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는 것이다. 결국 증조부는 둘째를 포기하셨고 할아버지는 네 형제 중 유일하게 까막눈이 되었다. 대신 머리가 총명하고 일 처리를 잘해 형제간 집안일은 모두 할아버지가 처리했다. 그러나 큰집이 망하면서 졸지에 무일푼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도끼를 들고 대들 정도였으니 얼마나 성질이 급하고 불 같았는지 알 수 있다. 그에 관한 얘기는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면, 지게에 짐을 지고 집 마당에 들어서다가 빨랫줄이 지게에 걸리면 낫으로 빨랫줄을 끊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한순간을 참지 못하고 더 큰 일을 만들었다. 이러니 같이 사는 할머니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불문가지다. 험한 부부싸움이 잦았다. 한번은 할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옆집 누구는 삼줄도 잘 매는데, 하고 가벼운 불평을 했더니 그냥 할머니 머리카락을 잡고 옆집 마당까지 끌고 갔다고 한다. 그렇게 좋으면 옆집 사람한테 가서 살라는 것이었다. 지금 같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구속감인 사건들이 많았다.
내 기억에는 머리에 피를 흘리는 할머니 모습이 아직 남아 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갑자기 담뱃대로 할머니 머리를 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장죽 끝에 달린 쇠로 된 뭉치- 우리는 그걸 '대꾸바리'라고 불렀다 - 는 할아버지의 위험한 무기면서 불편한 심기를 알리는 도구였다. 사랑방에서 대꾸바리로 놋쇠 재떨이를 땅땅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면 모두가 긴장했다.
결국 할머니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남편을 잘못 만나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사시다 가셨다.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남자 도포를 입히고 갓을 씌워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생에는 꼭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땅에 묻히시던 날, 여섯 살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천방지축 뛰어다니기만 했다. 뒷산에 나란히 누워계시는 두 분이 저승에서는 서로 화해를 하셨는지 모르겠다.
그런 할아버지지만 손자는 끔찍히 아꼈다. 지금도 동네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유별났던 손자 사랑을 말한다.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깔깔거리며 놀던 유년 시절이 제일 많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할아버지가 말 자세를 취하면 등에 올라타고는 할아버지 수염을 잡고 "이랴, 이랴" 하며 몰았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말 울음소리를 내며 날 태우고 방안을 기어 다니셨다. 동네잔치 때는 손자를 앞세우고 온 동네 골목을 춤추며 돌아다니셨다. "우리 토깽이 보게! 보게!" 할아버지 눈에는 손자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할아버지 산소를 찾을 때면 어머니는 혼잣말을 하신다. "그렇게 이뻐했던 손자가 온 것도 못 알아보고...."
어머니 말에 따르면 며느리 사랑도 지극했다고 한다. 내가 클 때만 해도 남자와 여자는 따로따로 식사를 했다. 특히 며느리는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부엌에서 대충 때웠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첫째 며느리를 어찌나 아꼈던지 방 아랫목 제일 좋은 자리를 며느리 자리로 지정하셨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는 꼭 밥을 남겨 며느리에게 주고 나가셨다고 한다. 맛있는 반찬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본 할머니는 "저 영감탱이!" 하고 혀를 차기도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마누라와 자식에게 못 준 사랑을 손자와 며느리에게 퍼부은 셈이다. 어머니와 내가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는 어찌나 미워했는지 아예 눈앞에서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구별이 이렇게 극단적이셨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친은 근면과 성실로 가난했던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가 시집오셨을 때는 밥 할 솥도 없었다고 한다. 부모에 대한 아픔과 가난이 선친을 그렇게 부지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식에게만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낮에는 면에서 근무하시고 밤에는 늦게까지 들에 횃불을 켜놓고 일을 하셨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일만 하시는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선친은 나중에 민선 면장까지 되시고 다른 공직도 거치셨다. 열심히 한 생을 사신 선친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회갑을 앞두고 세상을 뜨셨다. 다섯 자식을 피땀 흘려 키웠지만 효도를 받지도 못하고 가정을 이루는 걸 보지도 못하셨다.
셋째 할아버지 집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들 중 하나가 일본에 나가 사업을 해 돈을 많이 벌었다. 덕분에 그 집 형제들은 전부 일본에서 학교에 다녔다. 한 사람 때문에 집안 전체가 활기를 찾았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귀국을 했는데 배편으로 부친 살림과 전 재산이 부산에 도착하지 않았다. 당숙은 사연을 알아보러 다시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직껏 소식을 모른다. 전후 혼란기에 사람과 재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당숙모는 망부석이 되었고 가세는 침몰했다. 종조할매는 아들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 충격이었는지 일본에서는 똑똑했다던 동생도 한국에 돌아와서는 바보가 되었다. 나와 동생들은 '아픈 아제'라고 불렀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집에서 기식하며 지냈다. 당숙모는 홧병으로 한 쪽 눈을 실명했다.
글을 쓰는 한 지인이 자신의 가족과 친척에 관계된 이야기를 소설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분 가족사를 전해 들으니 역시 우리의 아픈 역사가 농축되어 있었다. 그분이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운명, 그리고 시대의 폭력을 함께 그려내길 기대한다. 가족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해석해보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할아버지대의 가족사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끄집어내 보았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도올의 혁세격문 (0) | 2012.12.17 |
---|---|
절망의 사회 (0) | 2012.12.11 |
제주 올레길 420km (0) | 2012.11.27 |
화를 내라, 그러나 잘 내라 (0) | 2012.11.22 |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0) | 2012.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