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에 일어나
불을 켜고
어제 못다 본 신문을 읽는데
석 줄도 안 나가서 꾸벅꾸벅
그렇다고 누우면 잠은 달아난다.
서너 줄 읽다가 눈 감고 잠깐 쉬고
다시 읽다가 꾸벅꾸벅.....
그렇다, 감자를 깎자.
이럴 때 나는 감자를 깎는다.
감자는 모조리 밤알만큼 한 것들
그것도 겨울 난 감자라 싹이 나고
시들시들 골아 버린 것을
무주 산꼭대기에 사는
강 선생이 갖다 준 댕댕이바구니에 담아 와서
왼손잽이 등산칼로 깎는다.
이 조무래기 감자는
그대로 찌면 아려서 먹기가 거북해
그래서 깎는 것이고, 깎는 재미로
깎는 맛으로 깎는 것이다.
왼손잽이 내 손은
야구나 정구를 하면
놀림바탕이 되었지만
감자 깎고 밭 매고 풀 베는 데는
아무도 흉보는 사람이 없었지.
감자를 깎으면
생각나는 것이 또 많다.
무엇보다도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누님 생각이 난다.
누님은 아침마다 밥을 하면서
쌀을 씻으면서
감자 깎는 일만은 언제나 나한테
시켰지. "덕아, 빨리 감자 깎어!"
그래서 그때부터 내 손에는
고무공보다 감자알이 더 잘 돌아가고
더 잘 잡혔다.
감자를 깎으면 정말 생각나는 것이 많지.
소죽 끓인 아궁이불에는 언제나 감자를 묻어 놓고
나 혼자만 먹었구나. 지금 생각하니
누님과 자주 싸운 까닭이 구운 감자를 나 혼자만 먹어서
그랬던 것이구나 깨달아진다.
70년이나 지난 뒤에야 그것을 깨닫다니!
그 누님을 저세상으로 보내고서야 깨닫다니!
그 누님은 얼마 전만 해도
고향 마을 산비탈에 능금나무 심어서
농약도 안 쳐서 굵지도 않고 꺼뭇꺼뭇 보기 흉한
벌레 먹은 사과를 한 상자씩 해마다 보내 주셨지.
그 과수원에 난 고들빼기 알뜰히 캐서 담근 김치도
자주 보내 주셨지.
감자를 깎으면 또 권정생 선생 생각
<감자떡>이란 시
감자같이 울퉁불퉁한 산골 아이들 얘기를 쓴 동화
권 선생의 문학은 감자를 먹고 사는 사람들 문학이란 생각.
감자를 깎으면 꼭 또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감자 깎는 어머니>
지금 내 앞에는
밀레가 그린 <저녁 종소리>가 벽에 걸려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쳐다보는 이 그림은
볼 때마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샘물인데
두 부부가 서 있는 발밑에는
방금 캐 담은 탐스런 감자알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구나.
밀레는 농민의 아들이라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고흐는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그렇다, 그 누가 한 말대로 정말 고흐는 밀레의 아들이었지.
그리고 우리들 감자 먹고 사는 사람들은 그 얼굴빛이
누런빛이든 검은빛이든 모두가
밀레와 고흐의 아들이요 딸이요 손자들 아니고 무엇인가?
감자를 깎으면 또 소죽솥에 넣어준 그 감자 껍질을 먹고
힘을 내어 밭을 갈고 짐을 싣던 소들이 생각난다.
그 소들은 모두 죽어서 어떻게 되었는가?
다시 흙이 되고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물이 되고
나와 너가 되어 이 땅에
이 우주에 가득 차 있겠지.
감자를 깎으면 온갖 생각이
마치 감자 껍질처럼 줄줄이
이어져서 즐겁다.
감자 깎는 맛이
감자 먹는 맛보다 더 낫다.
먹는 맛보다.
- 감자를 깎는다 / 이오덕
글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글 따로 삶 따로인 경우가 더 많다. 어쩌면 이름난 사람일수록 더하다. 글만 읽고 사람은 보지 말자고 하지만 글의 느낌이 바래는 건 어쩔 수 없다. 머리에서만 짜낸 글은 깊은 감동을 주기 어렵다.
이오덕 선생은 글이 곧 그대로 삶이신 분이셨다. 평생 바른 글쓰기 운동을 펼치신 선생은 삶과 유리된 말장난에 불과한 글을 경계하셨다. 어느 강연에서는 이 세상에서 시인이 제일 나쁘다고 하셨다. 글을 비틀고 쥐어짜고 어렵고 모호하게 만들어 바른 생각을 표현하여 삶을 가꾸는 데 이바지하는 일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선생의 시를 읽으면 선생의 알뜰하고 소박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진다. 가난하지만 감사하고 겸손하며 욕심 없는 삶, 감자를 깎는 선생의 맑은 마음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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