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머리맡에 대하여 / 이정록

샌. 2013. 8. 29. 10:47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 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줄이 내려오고

 

2

지게질을 할 만하자 / 내 머리맡에서 온기를 거둬 가신 차가운 아버지 / 설암에 간경화로 원자력병원에 계실 때 / 맏손자를 안은 아내와 내가 당신의 머리맡에 서서 / 다음 주에 다시 올라올게요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와 서울역에 왔을 때 / 환자복에 슬리퍼를 끌고 어느새 따라 오셨나요 / 거기 장항선 개찰구에 당신이 서 계셨지요 / 방울 달린, 손자의 털모자를 사 들고 / 세상에서 가장 추운 발가락으로 서울역에 와 계셨지요 / 식구들 가운데 당신의 마음이 가장 차갑다고 이십 년도 넘게 식식거렸는데 / 얇은 환자복 밖으로 당신의 손발이 파랗게 얼어 있었죠 / 그 얼어붙은 손발, 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 그 다음 주에 와서 / , / 그, / 그 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 안절부절이란 절에 요양 오신 몇 달 뒤 / 아, 새벽 전화는 무서워요 / 서둘러 달려가 당신의 손을 잡자 / 누군가 삼베옷으로 꽁꽁 여며놓은 뒤였지요

 

3

이제 내가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물수건이 되고 기도가 되어야 하죠

벌써 하느님이 되신 추운 밤길들

쓸쓸하다는 것은 내 머리맡에서

살얼음이 잡히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래요

진리는 내 머릿속이 아니라

내 머리맡에 있던 따뜻한 손길과 목소리란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예요 다음 주에 다음 달에

내년에 내후년에 제 손길이 갈 거예요

전화 한 번 넣을게요 소포가 갈 거예요 택배로 갈 거예요

울먹이다가 링거줄을 만나겠지요

금식 팻말이 나붙겠지요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기도 소리가

내 머리맡에서 들려오겠지요 끝내는

머리맡 혼자 남아 제 온기만으로 서성이다가

가랑비 만난 짚불처럼 잦아들겠지요

검은 무릎을 진창에 접겠지요

 

- 머리맡에 대하여 / 이정록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시를 읽으면 사람은 머리맡의 온기로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어지네요. 태어났을 때의 머리맡 축복에서부터 언젠가는 짚불처럼 잦아들 때 아련한 기도 소리까지,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머리맡에서 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머리맡에서 함께 해 주었던 누군가의 따스함이었어요. 내가 알아채지 못한 머리맡의 사연이 오죽 많았을까요. 이젠 나도 그이의 머리맡에서 물수건이 되고 기도가 되어야 하죠. 눈물 흘리는 이에게 따뜻한 손길 내밀어야 하죠. 오늘 아침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네요. 진리는 내 머릿속이 아니라 내 머리맡에 있던 따뜻한 손길과 목소리란 것을, 이 구절이 가슴을 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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