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샌. 2014. 2. 25. 11:16

종합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로 19년 동안 근무했던 지은이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좋은 죽음'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책이다. 병원 중환자실은 생사의 경계에 선 환자가 격리 치료를 받는 곳이다. 보호자는 정해진 시간에만 면회가 되고, 의식이 혼미한 환자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의료적 처치를 받는다. 기본적으로 보호자의 동의하에 이루어지지만, 환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지은이는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너무 괴로워 결국은 병원을 떠났다.

 

책에는 지은이가 직접 경험한 여러 사례가 실려 있다. 중환자실이라는 의료 현장에서 인간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는 내용이다. 중환자실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공호흡기와 기관절개술을 사용한다. 호흡을 쉽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기가 애처로울 정도로 환자의 고통은 심하다. 지은이는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이 꼭 그렇게 고통스러운 처치를 받으며 중환자실에서 죽어가야 하는지 묻는다. 첨단의학기술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유의하자는 것이다. 생명을 연장하는 일 못지않게 죽음의 질 역시 중요하다.

 

지은이가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경험한 죽음은 그렇지 않았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시골에서 장례식은 늘 떠들썩했다. 통곡과 설움의 몸짓들은 생전에 말로 하지 못한 것을 쏟아내며 죽은 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청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병원으로 대표되는 중환자실에서의 죽음은 맘 놓고 울 수도 없으니 진정어린 애도나 이별이 불가능하다. 가족들은 대개 의료 행위에 매달려 망자를 놓지 못하고, 의료진들 역시 제대로 이별할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아픔이 더 큰 것이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최첨단 의료 장비에 둘러싸여 병원에서 마지막을 맞는다. 환자는 사람이기보다는 기계가 표시하는 수치로 환원된다. 이 책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은 병원에서 맞는 이런 차가운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결론적으로 중환자실에서 맞는 죽음은 반인간적이며 온당치 못하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단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연명치료라면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환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이 있을 때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해 둘 필요가 있다. 환자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특정 치료를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가족들에게 생애 말기 치료에 대한 사항을 말로라도 분명히 밝혀두어야 한다. 이는 환자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환자 가족이나 의료진이 가지는 부담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현대 의료 시스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환자는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으며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 호스피스란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그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로서, 환자가 여생 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도우며 사별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경감시키기 위한 총체적인 돌봄'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목숨을 연장하기보다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면서 평안하게 마지막을 보내도록 호스피스 중심으로 의료 시스템이 개선된다면 좋겠다.

 

현대인은 약과 병원에 너무 의존한다. 병과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언젠가부터 외면하고 부정되는 대상이 되었다. 건강 검진의 남용도 심각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현대인의 의식이 우선 달라져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죽음을 바라고 있는지 여러 차례 생각했다. 병원에 안 가는 게 최선이겠지만 가더라도 기계에 의한 연명치료를 나는 거부한다. 의미 없는 심폐소생술도 마찬가지다. 가장 두려운 건 치매 같이 내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질병이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존엄사를 택할 수 있기를 원한다. 갑작스러운 죽음보다는 죽음의 과정을 의식하며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고통만은 피하고 싶다. 암이나 불치병이 무서운 것은 죽음 자체보다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 고약하기 때문이다.

 

복이 있다면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고 노화에 의한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 스콧 니어링이 그랬다. 100세가 되어서 자신의 수명이 다한 걸 느낀 니어링은 의식이 있을 때 서서히 곡기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맞았다. 위인의 죽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웰빙은 웰다잉으로 완성된다.

 

책의 끝 부분에서 지은이는 자신의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경험을 얘기한다. 사경을 헤매던 그때 지은이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나 이별 그 자체보다도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맙다거나 괜찮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 내가 편안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보호자나 의사는 죽음을 연장하거나 거부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전혀 부여하지 않지만, 환자들에게 그 시간은 전혀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는 걸 지은이는 깨달았다. 환자를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이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환자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내 가족의 결정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순간의 바람을 읽어주는 보호자가 되고 싶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아픈 이의 작고 느린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마지막까지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누리다 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보호자. 환자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는 숨김없이 알려주고, 그로 인해 불안한 순간까지 지켜봐줄 수 있는 성숙한 보호자. 그게 내가 가족을, 그리고 죽어가는 이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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