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에밀>을 이제야 읽었다. 전에는 처음 몇 장을 보다가 포기한 게 몇 번이었다. 아이를 기르는 교육이 나에게는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제는 꼭 한 번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다. 출판사 '돋을새김'에서 펴낸 책으로 편역으로 되어 있어 읽기에 부담이 덜했다.
25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의 교육서라고 해도 될 정도로 현대적이라는데 우선 놀랐다. 당시 분위기에서 이런 내용은 분명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 지도층은 격렬히 반발했고, <에밀>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루소는 다른 나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용기 있는 지성이 겪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아마 신앙에 관한 부분이 제일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성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루소는 종교 교육을 거부하면서 아이가 자신의 이성에 따라 종교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원받기 위해서 신을 믿어야 한다는 교리는 인간 이성에 반하는 헛된 가르침이라고 단언하다. 루소는 종교적 믿음을 포함한 기성의 고정관념을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우상으로 보았다.
<에밀>에는 루소의 인간관이 잘 드러나 있다. 인간 본성은 선하지만, 제도나 문명에 의해서 오염되어 있다. 모든 것은 조물주에 의해 선하게 창조됐음에도 인간의 손길만 닿으면 타락한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자연의 본성에 맞게 길러야 한다. 특히 유아기에는 아이의 발육을 억제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도시보다 시골에서 키우는 것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훨씬 더 바람직하다.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은 불행해진다는 것이 루소의 대원칙이다.
아이를 절대로 서둘러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시간을 낭비하라'고 한다. '서두르지 말라'는 루소가 아이를 가르치는 데 꼭 필요한 준칙이라면서 여러 차례 강조한다. 관례적인 악습에 물드는 것보다 더 아이를 망치는 건 없다. "그대로 내버려둬라. 자연의 움직임이 그를 드러낼 때까지 손대지 말라. 당신은 시간을 아껴야 하므로 서둘러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을 잘못 사용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시간을 잃는다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있다. 잘못된 교육은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당신은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이 불안한가? 낭비라고 생각하는가? 오,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아이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즐겁게 뛰어노는 일이 그렇게도 가치 없다는 말인가?"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 손자를 본지 일 년 정도 되었다. 손자 자랑을 하는 건 봐 줄 수 있는데 벌써 과학고나 외고에 보내야 한다면서 극성을 부린다. 갓 돌 지난 손자를 만나면 하는 말이 "오늘 공부 뭐 했어?"란다. 이 사람들 머릿속에는 유치원과 학원을 순례시킬 계획이 이미 다 세워져 있다. 경쟁적인 조기 교육, 선행 학습은 인간 성장에 독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에밀>을 읽어보라고 하고 싶지만 콧방위를 낄 게 분명하다.
루소는 아이를 과보호하지 말라고도 주의를 준다. 아이는 고통을 알아야 하고 위험이 무엇인지 겪어봐야 한다. 그런 경험이 아이를 강하게 한다. 작은 상처에도 기절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 그렇게 되도록 과보호로 아이를 격리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이를 실내에서만 키우지 말고 자주 산책시켜라. 밀밭 사이를 달리게 하라. 달리다 넘어져도 괜찮다. 아이는 일어날 것이고 더 빨리 자신을 추스를 것이다. 자유가 주는 즐거움엔 적지 않은 상처가 따른다. 에밀은 자주 상처를 입을 것이지만 언제나 즐거울 것이다. 그렇지 않은 아이는 상처를 덜 겪을지 모르지만, 항상 규제 받으며 우울하게 지낼 것이 틀림 없다. 거기에 무슨 이득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 시대의 부모들도 경청해야 할 루소의 충고다. 결국 아이를 바르게 기르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모의 첫째 의무는 자신이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덕망 있고 성실하게 살며 아이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게 먼저다. 주위 사람의 선생이 되지 못하면 아이의 선생도 되지 못할 것이다. 부모라고 해서 아이의 행복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에밀>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우리는 자식을 바르게 교육시키고 싶어 하지만 정작 어떤 교육이 바른 교육인지 알지 못한다. 바른 교육에 앞서 바른 인간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악습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그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한다. 병들어 있음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체제에 안주해 있는 교육은 모두 잘못돼 있다. 아이들에겐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이 책에 붙어 있는 '인간 혁명의 진원지가 된 교육서'라는 부제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현대 자본주의 교육은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되는가'로 목표가 바뀌었다. 인간 대신에 돈을 선택한 결과는 뒷날 재앙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책의 끝 부분에서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에밀, 현명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사라지지 않을 아름다움 외에는 집착하지 말아라. 네게 주어진 조건 안으로 네 욕망을 국한시켜라.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라. 필연의 법칙을 도덕률로 삼아 집착하지 않도록 하라. 잃는 법을 배워라. 삶을 관조함으로써 초월하는 법을 배워라. 역경 속에서도 견디는 법과 의무에 충실히 하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너는 운명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며 행복할 것이다. 욕망의 파도에 아랑곳없이 평화로울 것이다. 부숴지기 쉬운 것을 갖고 있을지언정 깨지지 않을 것이며,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풍족할 것이다. 세론에 지배받지 않는 너는 언제까지나 자유로울 것이다. 에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는지, 삶이 끝나는 순간 존재하기를 그친다고 생각하는지 너는 아니? 집착의 굴레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지를? 하지만 삶의 덧없음을 아는 너는, 죽는 순간 다시 존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죽음은 악인에게 있어서는 삶의 끝인지 모르지만, 올바른 사람에게는 시작인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