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절정 / 이육사

샌. 2025. 5. 18. 08:44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질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 절정(絶頂) / 이육사

 

 

6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이육사의 대표시로 '청포도'가 실렸다. 이 시는 그때 이육사를 배우면서 함께 외웠을 것이다. 이름의 '육사'가 시인이 감옥살이를 할 때 수인번호 '64'에서 따왔다는 설명을 듣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표현도 색다르게 느꼈다.

 

국어선생님이 이 표현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이 시를 지을 때의 시대 상황과 시인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의미로 사용했을지 짐작은 된다. 만약 그런 선입견을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강철'은 차갑고 비정하고 반자연적인 이미지다. '무지개'는 그 반대에 있다. 무지개마저 강철로 치환하는 시대에 대한 절망과 경고로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늘에는 '강철 무지개'가 뜨고 땅에는'철사줄 신경'을 가진 인간이 사는 디스토피아를 예견한다. 이미 우리는 기계보다 더 기계 같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다가올 새로운 문명은 인간이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냉혹한 겨울이 될지 모른다. 내 멋대로 상상해 보는 이육사의 시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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