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기차는 좀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 / 곽재구

샌. 2025. 5. 9. 10:38

어릴 적에

강 건너 산비탈 마을

기차가 지나갈 때

손 흔들었지

창밖으로 모자를 흔들던 이가

바람에 모자를 놓쳤을 때

보기 좋았지

 

어른이 되어 기차를 타면

창밖으로 모자를 흔들고 싶었지

강 건너 앵두꽃 핀 마을

아이들이 손을 흔들면

창밖으로 하얀 모자를 흔들다

명주바람에 놓아주고 싶었지

 

모자를 열 개쯤 준비해

강마을의 아이가 손을 흔들 때

하나씩 바람에 날리는 거야

 

KTX는 시속 삼백 킬로미터로 달리지

손을 흔드는 아이도 없지

 

기차는 좀 느리게 달려야 해

사람은 좀 느리게 살아야 해

사람이 기차고

기차가 사람이야

미친 듯 허겁지겁 사는 거 부끄러워

 

시속 삼십 킬로미터면 강마을

아이들과 손 흔들 수 있어

시속 이십 킬로미터 구간에선

초록의 꽃들과 인사 나눌 수 있지

시속 십 킬로미터면 초원의 소들에게

안녕, 무슨 풀을 좋아해? 물을 수 있어

 

목포에서 신의주

6박 7일에 달리는 거야

우리나라 강마을 아이들 모두 모여

하얗게 손 흔들다

모자를 찾으러 강물 속 풍덩 뛰어들 수 있게

 

- 기차는 좀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 / 곽재구

 

 

고향 마을 앞으로 중앙선 기찻길이 지나갔고 태어나서부터 늘 기차 소리와 함께 살았다. 시커먼 몸통의 증기기관차가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칙칙폭폭 달리는 광경은 일상의 풍경이었다. 석탄을 가득 실은 화물차가 북쪽으로 향할 때는 속도가 느려서 발 빠른 청년들은 몰래 올라타서 읍내에 나가기도 했다. 여름이면 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다가 객차가 지나가면 물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 창가에 앉은 승객들 얼굴이 보이고 따라서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의 기차는 속도가 느려 안에 탄 사람들이 입은 옷의 색깔이며 웃는 얼굴까지 볼 수 있었다. 기차와 기찻길은 내 유소년 시절의 낭만적인 풍경 중 하나다.

 

그때는 기찻길을 따라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지간한 속도에는 익숙해져 기차가 지나가도 개의치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사고도 봤다. 장을 보러 가던 마을의 한 아줌마의 치마가 바람에 휩쓸리며 기차 바퀴에 감겨서 사망한 것이다. 뒤에 기차가 고속화되면서 길은 자갈로 덮이고 사람이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신작로가 시멘트로 포장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변화였다. 사람과 탈것이 공존하며 살던 느린 시대는 끝났다.

 

옛날에는 고향에서 서울로 가자면 기차로 일곱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두 시간이면 주파한다. 시속 삼백 킬로미터로 달리는 KTX라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에서 승객들은 더 이상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기차를 보고 손을 흔드는 사람도 없다. 속도가 빨라져서 남는 다섯 시간을 현대인은 어떻게 이용할까. 삶이 그만큼 여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더 바빠졌다. 속도가 빨라져서 남는 시간은 능률이라는 악마가 잡아먹었다. 현대인은 더 바빠지기 위해서 더 빨리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기차는 좀 느리게 달려야 해

사람은 좀 느리게 살아야 해

사람이 기차고

기차가 사람이야

미친 듯 허겁지겁 사는 것 부끄러워"

 

우리는 무엇을 향해 이리 급하게 달리고 있는 걸까. 아이들을 놓치고, 꽃을 놓치고, 초원의 소들을 놓치면서 무엇을 얻자고 이리 허겁지겁일까.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지만 행복과는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지, 이 시를 읽으며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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