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를 위해 가면을 써라." 인문학자인 엄기호 선생이 쓴 책을 읽고 있는데 눈에 확 들어온 문장이다. 동료를 대할 때는 가면을 벗고 진실된 마음으로 마주해야 할 텐데 가면을 쓰라니, 이건 무슨 말인가.
선생이 말하는 뜻은 동료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세심한 배려라는 것이다. 의미를 추구하는 순간 친구들과의 관계가 깨지기 쉽다. 내 경우를 돌아보아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알게 모르게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나봤자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아무 의미가 없는데 뭣 하려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끊은 모임이 여러 개다. 만나면 배울 점도 있고, 생각할 만한 점도 있고, 유용한 점도 있어야 하는데 만나면 하나마나한 말만 하니까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선생의 말을 인용한다.
"삶이란 연극배우가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라 자신이 맡은 역할을 의례처럼 반복하는 공연과 같다. 그러나 같은 연극이란 없다. 이 연극에서 써야 하는 가면은 나를 감추는 가면이 아니다. 다른 친구들에게 친구로서 나를 드러내는 가면이다. 이 연극에서는 '친구'라는 가면을 쓰고 맡은 배역에 충실하게 서로의 삶을 응원해야 한다. 이것이 친구로서의 우정, 배려가 된다. 친구들에게 '의미' 따위를 늘어놓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의 삶을 보호해 준다. 이 연극에서 서로를 기쁘게 하는 것은 '친구'라는 가면에 충실한 연극이다. 이것이 이 '연극'의 진실이다. 감동은 진실로 연극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가면을 벗을 때 오는 것이 아니다."
선생은 동지가 아니라 동료로서 만나기를 권한다. 동지는 같은 방향의 의미를 추구하지만, 동료는 평등하게 우정을 나누는 관계다. 어찌 할 수 없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이 세상에서, '혼자이면 외롭고 같이 하면 괴로운'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동료애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체험보다는 경험, 기대보다는 희망, 힘보다는 용기, 동감보다는 공감에 대해서도 말한다. 동지보다는 동료도 같은 맥락이다. 어찌 보면 단어의 미미한 차이 같지만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삶의 희비가 갈린다는 것이다.
가면은 나를 감추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나를 드러내는 가면도 있다. 이 가면은 친구를 위해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서 쓰는 가면이다. 가면을 쓰라고 해서 마음에 없는 바를 억지로 행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느냐보다 말을 주고받는 '태도'에 배려의 에너지가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배려다. 무의미를 견뎌내고 즐거워하는 배려 말이다.
내 삶의 기준은 지나치게 의미에 경도되어 있었음을 고백한다. 의미는 넘쳤고 배려는 무시되었다. 그래서 내 세계를 구축할 수는 있었지만 - 그마저 나만의 작은 성일지도 - 잃는 것도 많았다. 선생의 글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며 성찰한다. 이 삭막한 세상에서 어떻게 타인을 대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의미를 추구한 결과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한쪽으로 기울었던 의미/배려의 균형을 이제는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