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갔는데 약속 시간에 30여 분 일찍 도착했다. 약속 장소가 20년 전에 살았던 동네라 옛 추억을 되살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살았던 아파트 단지 안에도 들어가 보고, 자주 왕래하던 길도 걸었다. 골목길 모퉁이의 편의점은 그대로였고, 음식점은 간판만 바뀌었을 뿐 그때에 비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치고는 변화가 적은 동네였다. 20년의 중첩된 세월을 경험하는 기분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씁쓰레한 추억이 몇 개 떠올랐다. 그때는 내 잘못으로 서울 집을 잃고 전세살이를 하던 시기였다. 마침 계약이 만료되어 가는데 집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집값이 폭등하면서 덩달아 전셋값도 치솟았다. 집주인이 터무니없이 값을 올려서 같은 집에 계속 살 수는 없었다. 작은 집으로 가든지 더 변두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집을 구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오니 지친 아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전세로 나온 집도 드문데 다음날이면 또 값이 올라간다고, 서울에서 우리가 살 데는 없다고 한탄했다.
내 꿈이 좌절되었을 망정 결코 자존심을 굽히지 않을 때였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내 집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이상만으로 살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휴일에는 직접 발품을 팔며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다가 산이 가까운 곳에 겨우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등산하듯 경사길을 오르내려야 했지만 서울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당시는 내 인생의 전환기였다. 청소년 시절의 사춘기는 없는 듯 지나갔지만, 40대 중반부터 찾아온 사추기(思秋期)는 심하게 앓았다. 내 앓이가 심할수록 가족의 고통도 늘어났다. 멀쩡하게 살던 집을 내팽개치듯 처분하고 삶의 본연을 찾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마가리'로 향했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한창 예민한 나잇대였는데 중심을 잡아야 할 남편마저 방황하고 있었으니 아내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지금 돌아보면 가족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 뒤에 아내가 뇌수술을 받고 건강이 나빠진 것도 내 탓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안정을 다지는 4, 50대에 나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경험했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여파는 컸다. 깨지고 상하고 문드러진 폐허는 아직 남아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것은 잘못 건드린 동티였는지 모른다.
친구를 기다리며 공원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맑고 초봄의 햇살은 따스했다. 이 친구는 20대에 같은 직장에서 만나 70대가 된 지금까지 교유하고 있는 사이다. 이 친구와의 인연에 대해, 세상과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뭉클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풍파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짧은 인생이지만 온갖 사연들을 안고서 각자의 몫을 살아낸다.
약속 시간이 남아서 한 옛 동네 산책이 추억을 소환하고 온갖 상념을 불러냈다. 힘겹게 넘었던 봉우리도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면 무수한 작은 봉우리 중 하나였지 않은가. 공원 입구에서 친구가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