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영국으로 연수를 간 조카가 외국 생활의 일면을 가끔 전해준다. 런던에 방을 얻고 세간살이를 장만하는 것부터 한국과 비교하면 너무 늦어 불편하다고 하소연이다. 인터넷을 신청했더니 일주일 만에 와서 설치해 주더란다. 너무 느린 나라에 오니 적응이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쁘게 사는 한국 사람이 불쌍해 보이더라고 말한다. 생활의 편리함을 음지에서 지탱해 주는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보인 것이다.
얼마 전에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보험회사에 연락했다. 기계음이 들리면서 위치 추적을 허용하시겠느냐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10분 뒤에 바로 기사가 도착했다. 있는 곳을 말해 줄 필요도 없었다. 신속 정확도 좋지만 너무 잽싸니 오히려 무섭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서비스 수준은 세계 제일이라고 할 만하다.
돈만 있으면 살기에 제일 편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한다. 장보기나 음식 배달을 포함해 뭐든지 클릭 몇 번으로 집안에서 다 해결된다. 밖에 나가면 밤늦게까지 먹고 마실 수 있다. 노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다. 반면에 외국은 우리 기준으로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밤에 음식점이나 술집 찾기도 만만치 않다. 점심 뒤에는 낮잠을 자야 한다고 문을 닫기도 한다.
유럽 사람은 퇴근하면 대부분 가정으로 돌아가 가족과 저녁 시간을 함께 한다. 우리처럼 시내 번화가가 북적이지 않는다. 우리는 야근에 회식에 가족과 보낼 시간이 거의 없다. 거리는 집을 잊은 사람들로 불야성이다. 화려해 보이는 이면에는 많은 사람의 고통이 있다. 사는 게 전쟁터 같다. 어느 쪽이 행복한 사회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할 때마다 고생만 하고 좋은 세상을 못 보고 갔다고 아쉬워한다. 좋은 세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이 된 건 맞지만 그것이 좋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물질보다는 사람이 중심인 나라, 바쁘게 쫓기며 살기보다는 여유 있고 행복하게 사는 나라가 좋은 세상이 아닐까.
물론 어느 나라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나름의 고민거리가 있다. 외국에 나가 보면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란 걸 실감한다. 우리는 서구를 따라잡느라 급속한 발전을 한 탓에 부작용 또한 만만찮게 경험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부를 추구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어느 시점이 되면 브레이크를 걸고 주위를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의 건강을 회복하는 길이다.
잘 사는 나라는 맞지만 좋은 세상은 아직 되지 않았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돈만으로 안 되는 게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빨리 빨리 보다는 천천히 여유롭게, 조카의 영국 얘기를 들으면서 그 느림이 오히려 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