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보살 / 김사인

샌. 2016. 8. 16. 10:24

그냥 그 곁에만 있으믄 배도 안 고프고, 몇 날을 나도 힘도 안들고, 잠도 안 오고 팔다리도 개뿐하요. 그저 좋아 콧노래가 난다요.

숟가락 건네주다 손만 한번 닿아도 온몸이 다 찌르르 허요. 잘 있는 신발이라도 다시 놓아 주고 싶고, 양말도 한번 더 빨아놓고 싶고, 흐트러진 뒷머리칼 몇 올도 바로 해주고 싶어 애가 씌인다요.

거기가 고개를 숙이고만 가도, 뭔 일이 있는가 가슴이 철렁허요. 좀 웃는가 싶으면, 세상이 봄날같이 환해져라우. 그 길로 죽어도 좋을 것 같어져라우.

남들 모르게 밥도 허고 빨래도 허고 절도 함시러, 이렇게 곁에서 한 세월 지났으면 혀라우.

 

- 보살 / 김사인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오염된 세상에서 이런 건 뭐라 불러야 할까. 인간이 아가페의 흉내를 낸다면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도 누구나 한 번쯤은 반짝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계산도 주고받음도 없었던, 그대를 향한 순수한 마음만 빛났던....

 

시에 나오는 '거기'를 흉내내서 아내에게 한 번 써본 적 있었다. 핀잔만 받았다. 이 시의 화자가 말하는 '거기'라는 호칭은 의미심장하다. 다만 멀리서 바라보고픈,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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