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마광수

샌. 2017. 9. 9. 09:57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

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

현실적으로

진짜 현실적으로

 

-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마광수

 

 

안타까운 죽음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내렸다 한다. 그분의 작품이나 언행을 모두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한 개인을 난도질한 것은 분명하다. 현실은 그의 시나 소설보다 더 음란한데 말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전 모임에 '반야'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이 있었다. 불교 신자라서 응당 '지혜'를 뜻하는 불교 용어를 차용한 줄 알았는데, '반쯤 야한' 여자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전야든 반야든 야한 여자를 마다할 남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숨기고 있을 뿐, 마 교수는 그런 우리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까발렸을 뿐이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냉이 / 권정생  (0) 2017.09.22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백석  (0) 2017.09.17
석유장수 / 심호택  (0) 2017.08.31
산다 / 다나카와 슌타로  (0) 2017.08.25
선풍기 / 이정록  (0) 2017.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