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맑고 향기롭게

샌. 2020. 1. 7. 21:26

전에 살던 집 거실 벽에는 '맑고 향기롭게'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신영복 선생이 쓴 붓글씨 복사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 '맑고 향기롭게'는 법정 스님의 정신을 기리는 불교 운동으로 알고 있다. 종교를 떠나서 '맑고 향기롭게'라는 말이 무척 아름다웠고, 그 말이 주는 의미를 내 삶의 지표로 삼고 싶었다. 가당찮은 바람인 걸 알지만, 그때는 피안을 향한 무한 갈망의 시기였다.

 

며칠 전에 <금강경>을 읽다가 '맑은 믿음'이라는 구절을 접하고 문득 '맑고 향기롭게'가 떠올랐다. 불교가 구현하려는 경지는 결국 '맑음'으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 '맑은 믿음' 하나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믿음이 무엇인지, 이 시대에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맑은'이 주는 무게감이 만만찮다. 하물며 맑은 생각, 맑은 말, 맑은 가난, 맑은 삶 등으로 확장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엄중함이 날카롭게 버려진 칼날처럼 섬뜩다.

 

법정 스님이 표상하는 정신은 무소유다. 무소유와 '맑음'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있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소유의 삶이 가능할까? 혹자는 정신의 무소유를 주장한다. 욕심이 없고 집착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성인의 지적을 견뎌낼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대부분은 자기 위선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

 

수백 년 전에 한 선비가 살았다. 그는 중앙 관리로 임명을 받고 한양에 집을 샀다. 십여 년 생활을 한 후 병이 들어 낙향하려고 집을 팔았을 때 차익이 꽤 됐다. 선비는 그동안 생활한 것만 해도 고맙다며 집을 팔아 번 돈은 주변 가난한 이들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무소유의 정신을 언급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 속에 살면서 '맑음'을 지키는 것이 가능한지 아직 나는 확신이 없다. 불교에서 실제 무소유 운동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모른다. 한때 천주교에서는 '내 탓이오' 캠페인을 벌였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백석 시인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노래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기세(棄世)든 피세(避世)든 세상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세상 속에서 조화를 찾는 것은 백전백패임을 알기 때문이다.

 

맑은 삶도 언감생심인데 하물며 향기로움이랴.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한다." 법정 스님의 말씀이다. 한 맑음이 다른 맑음에게 향기를 전하고, 그 향기가 다른 맑음을 일깨우고, 이렇게 온 사회가 향기로 가득할 세상이 과연 가능할까? 개인의 의지는 어떻게 사회적 연결망으로 확산되어 갈까? 무한증식하는 인간의 세찬 탐욕 앞에서 연약한 촛불을 지켜낼 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비관적으로 되고 의기소침해 진다. 다시는 탈출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이젠 눈에 띄는 곳에 '맑고 향기롭게'를 걸어둘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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