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히말라야 환상방황

샌. 2020. 6. 21. 10:54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에는 두 코스가 있다. 하나는, ABC라 불리는 베이스캠프 트레킹으로 안나푸르나 주봉 아래 베이스캠프(4,130m)까지 갔다 돌아오는 코스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을 만큼 무난하다. 둘은, 안나푸르나 산군을 한 바퀴 도는 라운딩 코스로 난이도가 높다. 5,416m인 쏘롱라패스를 지나는 111km 길이다.

이 책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은 정유정 작가가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를 다녀온 기록이다. 2013년 9월 5일에 베시사하르를 출발하여 9월 21일에 나야폴에 도착했다. 총 17일이 걸렸다.

작가는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을 안나푸르나 트레킹으로 잡았다. 답답한 일상의 탈출구로 히말라야를 선택했다. 동행은 후배 작가였다. 가이드와 포터, 그리고 여자 둘이 한 팀이 되어 히말라야를 걸었다.

역시 작가는 다르다. 얼마나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단숨에 읽었다. 영화보다 더 실감 났다. 트레킹 이야기 곳곳에 작가의 개인사가 양념처럼 들어 있다. '신의 땅'이라는 히말라야는 결국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나마스떼'라는 네팔 인사말은 '당신 안에 깃든 신성을 경배합니다'라는 뜻이다.

스스로 골방체질이라고 부르는 작가에게 히말라야 트레킹은 고생길일 게 뻔했다. 음식, 변비, 고산병으로 무척 힘들어한다. 그러나 작가는 엄청 활달하고 씩씩하다. 가이드가 "You are a fighter!"라 말할 정도로 어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고 이겨낸다. 지난번에 읽은 <7년의 밤> 같은 소설을 쓰는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만하다.

라운딩 코스의 정상인 쏘롱라패스에서 환희를 즐길 새도 없이 급히 하산해야 했던 사연이 재미있다. 팽팽해져서 아파오는 아랫배 때문에 화장실이 있는 차바르부까지 50분에 달려갔다. 쏘롱라패스와는 고도차가 1,416m나 되는 곳이다. 작가 말로는 음속을 돌파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남자라면 노상방뇨를 선택했을 것이다. 히말라야의 신에게 잠시 눈을 감아 달라고 기도를 한 뒤에.

책을 읽으며 11년 전 랑탕-고사인쿤트 트레킹을 갔을 때가 아련히 떠올랐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하는 작가 따라 나도 랑탕 계곡을 걸었다. 아, 다시 히말라야에 가고 싶다. 가슴이 콩닥거리는 기쁨을 준 정유정 작가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린다.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는 '환상'을 '幻想'으로 이해했는데, 읽는 중간에 '環狀'임을 알아챘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다시 '幻想'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히말라야에 들어가 본 사람은 다시 히말라야를 꿈꿀 수밖에 없다. 그것이 '환상방황'이 말하는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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