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문장의 온도

샌. 2020. 6. 6. 12:11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선생은 별명이 간서치(看書痴)였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가난한 서얼 출신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학문을 갈고닦았다. 북학파 실학자로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활약한 최고의 독서가며 문장가였다.

그는 성리학적 글쓰기를 지양하고 소소한 일상과 주변에서 관찰되는 사물에 집중한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을 안에 숨은 아름다움을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낸다. 책을 좋아했지만 글자에만 매몰되지 않고 일상의 살아있는 현상들에서 세상의 원리를 발견한다.

<문장의 온도>는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와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뽑은 글을 모은 책이다. 한정주 선생이 엮고 옮겼다. 두 책 모두 이덕무가 20대 때 쓴 글로 그만의 특유한 감성과 사유가 묻어 있다. 조선 시대 때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신기하게 느껴진다. <이목구심서>는 제목 그대로 평소 듣고 보고 말하고 생각한 것을 글로 옮긴 책이고, <선귤당농소>는 '선귤당에서 크게 웃는다'는 뜻처럼 일상생활 속의 신변잡기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는 점이 이덕무 글의 특징이다.

비록 선문이긴 하지만 선생의 글에서는 맑고 청량한 기운이 느껴진다. 따스한 봄바람 같다가 어떤 때는 차가운 북풍이 된다. 글의 바탕에는 세상에 대한 비분강개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출신의 한계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꽃 피우지 못하는 데 대한 울분이 있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덕무도 조선 시대 아웃사이더의 한 사람으로 봐도 되겠다.

친구였던 박지원의 말에 의하면 이덕무는 평생 동안 2만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40년을 잡으면 한 해에 500권을 읽은 셈이다.

선생의 글 두 편을 옮긴다.

몇 해 전 경진년(1760)과 신사년(1761) 겨울, 내 조그마한 초가집이 너무나 추워서 입김이 서려 성에가 되고 이불깃에서는 와삭와삭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비록 성품이 게으르지만 밤중에 일어나 황급히 <한서(漢書)> 한 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 조금이나마 추위를 막아 보았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얼어 죽어 후산(后山)의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젯밤에도 집 서북쪽 모퉁이에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등불이 심하게 흔들렸다. 추위에 떨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논어(論語)> 한 권을 뽑아 바람막이로 삼았다. 스스로 임시변통하는 수단이 있다고 으쓱댔다. 옛사람이 갈대꽃으로 이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특별한 경우에 불과하다. 금과 은으로 상서로운 짐승을 조각해 병풍을 만든 사람도 있지만, 이는 너무 호사스러워 본받을 것이 못 된다. 어찌 내가 천하에 귀한 경서인 <한서>로 이불을 삼고 <논어>로 병풍을 만든 것만 하겠는가! 왕장(王章)이 소가죽을 덮고 두보(杜甫)가 말안장으로 추위를 막은 일보다 낫지 않은가! 을유년(1765) 겨울 십일월 이십팔 일에 기록하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는다면 나는 마땅히 십 년 동안 뽕나무를 심을 것이고, 일 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다섯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할 것이다. 열흘에 한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한다면 오십 일 만에 다섯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오색의 실을 따뜻한 봄날 햇볕에 쬐어 말리고, 아내에게 부탁해 수없이 단련한 금침으로 내 지기의 얼굴을 수놓게 해 기이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 것이다. 그것을 높게 치솟은 산과 한없이 흐르는 물 사이에 걸어 놓고 서로 말없이 마주하다가 해질녘에 가슴에 품고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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