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인으로부터 일산 호수공원에서 김훈 작가를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작가는 20년째 일산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호수공원이 즐겨 찾는 산책 코스다. <연필로 쓰기>의 전반부는 호수공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물이 소재로 등장한다. 일산 호수공원에 나가면 벤치에 앉아 있는 작가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처럼 김훈 작가는 글을 쓸 때 연필을 고집한다. 컴퓨터의 편리함을 알겠지만 연필이 주는 아날로그의 감성을 버리기 싫은가 보다. 글 쓰는 행위나 문체에서 작가 특유의 고집이 읽히기 때문에 작가를 좋아한다. 건조한 듯 담백한 듯하면서 의미의 정수를 캐내는 작가의 문체도 좋다.
<연필로 쓰기>는 작년에 나온 작가의 산문집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듯하지만 치열한 삶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는다. 특히 신문에 발표한 글은 사회성이 진하다. 작가의 장점은 세밀한 관찰력과 사색에 있다. 사실적 풍경에 작가의 감성이 다채로운 색을 입힌다. 글을 읽다 보면 탐나는 부분이 많다.
이번에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나는'이나 '내가'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 걸 발견했다. 학생 시절에 글쓰기를 배울 때 일인칭은 사용하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다. 쓰기에 따라 힘 있는 문장이 될 수도 있다.
'호수공원의 산신령'의 한 부분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동네 아이가 공원에서 두발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뒤따르는 자전거들이 많았으므로, 나는 아이를 안아서 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이는 무르팍이 깨져서 피가 조금 배어나왔다.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 아이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엄마 핸드폰 번호를 물어서 내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연락해 주었다. 집이 가까워서 엄마는 금새 달려왔다. 젊고 아름다운 엄마였다. 울음을 그쳤던 아이는 엄마를 보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은 엄마를 보면 참았던 설움이 복받치는 모양이다. 아이는 울면서 엄마한테 말했다.
- 내가 넘어져서 우는데, 이 산신령 할아버지가 날 구해줬어.
아이 엄마는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면서 깔깔 웃었다. 아이 엄마가 말했다.
- 얘가 그림책을 너무 많이 봐서 이렇게 됐어요. 할아버지, 죄송해요.
요즘도 산신령 나오는 그림책이 있는 모양이다.
아이는 동화 속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울음을 그친 아이는 엄마와 함께 돌아가면서 나를 향해 단풍잎 같은 손을 흔들었다. 일산에서 20년을 살고 나니 나는 호수공원의 산신령이 되었다.
'눈을 치우며'에 나오는 부분이다.
얼마 전 남한산성에 다녀오는 길에 성남 모란시장으로 구경 갔더니 마침 오일장이 서 있었다. 장마다 돌아다니면서 망치, 펜치, 톱, 호미, 삽 같은 쇠붙이 연장을 파는 장수가 전을 벌이고 있었다. 3인 1조가 되어서 곱사춤, 병신춤, 곰배팔이춤에 만담을 곁들여 손님을 끌어모아놓고 물건을 팔았다. 관객은 열댓 명 정도였다. 나는 돼지껍데기볶음을 한 접시 사다 먹으면서 맨 앞줄에 앉아 구경했다. 행수(行首)쯤 되어 보이는 더벅머리 사내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했다. 젊은이들이 컴퓨터와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고 살아서 도무지 연장을 쓸 줄 모르는 동물로 퇴화했으며, 살아 있는 몸의 건강한 기능을 상실했고, 인간성의 영역이 쪼그라드는 현실을 그는 문명비평적으로 개탄했다.
그가 핏대를 올려가며 소리질렀다.
- 아, 니미, 서울공대를 톱으로 나온 녀석들이 못대가리 하나를 못 박고, 닭모가지를 못 비틀어. 아, 제미, 로스쿨 톱으로 나온 놈들이 펜치를 못 쥐고 도라이버를 못 돌려. 이게 사람이냐, 오랑우탄이냐. 몸이 다 썩은 놈들이 어떻게 밤일을 해서 새끼를 낳는지.
나는 박수쳤다. 다들 박수쳤다. 나는 그 연설에 감동해서 당장 삽 한 자루를 샀는데, 올겨울에 그 삽으로 눈을 치웠다.
'늙기와 죽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늙어서 슬픈 일이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못 견딜 일은 젊어서 저지른 온갖 못난 짓거리와 비루한 삶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 어리석은 짓, 해서는 안 될 짓, 함부로 써낸 글, 너무 빨리 움직인 혓바닥, 몽매한 자만심, 무의미한 싸움들, 지겨운 밥벌이, 계속되는 야근과 야만적 중노동.... 이런 기억이 몰고 오는 슬픔은 뉘우침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한(恨)이나 자책일 뿐이다. 그 쓰라림은 때때로 비수처럼 가슴을 찌른다. 아아, 나는 어쩌자고 그랬던가. 그때는 왜 그 잘못을 몰랐던가.
이보다 더 슬픈 일은 그 악업과 몽매를 상쇄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미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절벽과 마주선다.
이런 회한과 절벽을 극복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 절벽을 직시하는 힘으로 여생의 시간이 경건해지기를 바란다. '경건'이라고 쓰니까 부끄럽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경건성을 상실한 지가 얼마나 오래인가.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여생의 날들을 온전히 살아나갈 궁리를 하는 쪽이 훨씬 더 실속 있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날이 저물어서 빛이 물러서고 시간의 밀도가 엷어지는 저녁 무렵의 자유는 서늘하다. 이 시간들은 내가 사는 동네, 일산 한강 하구의 썰물과도 같다. 이 흐린 시야 속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연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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