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경성에서 보낸 하루

샌. 2020. 5. 18. 10:49

청소년과 함께 떠나는 경성 여행기다. 때는 일제 강점기인 1934년의 어느 봄날이다. 친일파 두취(頭取, 은행장)의 아들이 유학 중인 동경에서 귀국하여 하루 동안 경성을 둘러보는 내용이다. 사실적인 묘사가 실제로 당시 경성 시내를 거니는 듯하다.

 

1934년은 일제의 식민 통치 체제가 더욱 단단해지고 해방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 버린 시대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전시 체제로 돌입하기 직전의 비교적 안정된 시대였으며, 식민지의 그림자를 덮어버릴 정도로 경성은 화려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그때 경성은 인구가 40만 정도 되었는데 일본인은 12만 정도였다.

 

경성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일본인은 주로 남촌에 거주했다.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 시설이나 유흥업소도 남촌에 주로 형성되었다. 요사이 강남이 조명받는 것과 비슷했던 것 같다. 당시에 "북촌의 하늘은 어둡고 남촌의 하늘을 밝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남촌의 중심지는 선은전 광장이었다. 조선은행,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우체국이 모여 있는 곳으로, '선은전'은 '조선은행 앞'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경성에서 제일 화려한 거리인 혼마치(本町)가 시작된다. 지금의 남쪽 명동길이다. 도로 폭이 넓지는 않지만 거리 양쪽에 백화점, 극장, 호텔, 식당, 카페 등이 있었고, 가게에는 박래품(舶來品)이 넘쳐났다고 한다.

 

이 거리를 모던 보이, 모던 걸이 활보하며 유행을 이끌었다. '못된 보이' '못된 걸'이라고도 불린 그들은 1920년대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하며 자신들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모던 걸의 패션은 무릎이 보일락 말락 하는 짧은 스커트에 살색 스타킹을 신고, 뾰족한 하이힐에 끈이 짧은 핸드백을 어깨에 멨다. 봄과 여름에는 화려한 꽃무늬 양산, 겨울에는 여우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다녔다. 모던 보이들은 맥고모자에 양복을 입고 흰 구두를 신었다.

 

반면에 조선인이 많이 사는 북촌은 조용한 편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북촌 한옥은 1930년대에 도시형 한옥 단지로 조성되었다 한다. 요사이 식으로 말하면 아파트 단지와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조선 사대부 집 구조와는 다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두취의 집도 여기에 있었는데 당시에도 상류층 가정에 냉장고와 전기청소기가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경성에서 보낸 하루>를 보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스타일이 대부분 일제 강점기 시절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이나 행정 체계, 소비문화, 생활 습관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1930년대 교육 시스템 그대로 6, 70년대의 우리가 교육을 받았다. 우리나라 근대의 출발이 강요된 식민지 체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는 아직도 우리가 주체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는 원인이 아닌가 여겨진다. 친일 청산을 못 한 것도 피지배 경험이 워낙 깊이 배인 탓이 아닌가 싶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경성을 거쳐 서울이 되었다. 그때 경성은 상업 도시이자 소비 도시였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본정 거리를 거닐고, 백화점과 상점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밤거리는 불야성을 이루었다. 경성은 지배와 피지배, 문명과 야만, 향락과 규율, 전통과 근대, 봉건 여성과 신여성, 친일과 독립 등 모순된 두 얼굴이 한데 얽혀 있는 공간이었다. 지금 그곳에 간다고 해도 전혀 낯설 것 같지 않은, 현대의 우리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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