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시옷의 세계

샌. 2020. 6. 27. 10:20

김소연 작가 하면 <마음사전>이 먼저 떠오른다. 그 책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하게 남아있어서다. 마음을 지긋이 또는 예리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감성에 빨려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했는데 이 책이 조금은 해결해줬다.

<시옷의 세계>는 시옷으로 시작하는 낱말을 주제로 하여 작가의 속내를 드러낸 책이다. 사라짐, 사소한 신비, 산책, 살아온 날들, 상상력, 새기다, 새하얀 사람 등 서른네 항목으로 되어 있다. 글 속에는 작가의 삶과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부제가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이다.

선택적 가난과 고결한 정신의 아름다움을 작가는 삶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세상을 따라가느라 우리가 내팽개친 잊혀진 가치들을 다시 소환한다. 우리가 누리는 윤택함이 얼마나 많은 이에게 빚지고 있는지 잊고 사는, 나만 안녕하다는 사실에 그저 안도하는 괴물이 된 우리들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부조리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김수영, 송경동, 신해욱, 심보선, 브레히트, 쉼보르스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을 봐도 작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다. 'Simple Life, High Thinking'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작가의 문장은 삶에 지친 이에게 위로와 용기가 된다. 그렇다고 따스하기만 한 메시지는 아니다. 투쟁하고 싸우면서 내 길을 걸어가는 데에서 인생의 의미가 나온다고 말한다.

작가의 글 중에서 '스트러글(Struggle)'의 일부를 옮겨 적는다.

Struggle

struggle : 투쟁하다, 고투하다, 몸부림치다, 허우적거리다, 힘겹게 나아가다, 나쁜 결과를 막기 위해 싸우다, ~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 힘이 들다.

투쟁이라는 건 반드시 패기와 결기로 똘똘 뭉친 지사의 행동 양식만을 뜻하진 않는다. 몸부림치고 허우적거릴 뿐인 패자의 눈물 나는 행동 양식도 투쟁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냐고 연필을 집어 던지는 책상머리에서의 십 대도 투쟁 중인 거고, 세상에 되는 일 하나 없다며 절망에 찬 보고서를 촘촘하게 적는 이십 대의 일기장도, 비정규직을 자처하며 하고 싶은 일만 골라 하는 삼십 대의 통장 잔고 제로 상태도, 포장마차에서 4인분 족발을 쌓아놓고 홀로 소주잔을 움켜쥔 사십 대의 고독도, 사표를 내던지곤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꿈꾸며 창업 교육 센터를 찾는 오십 대의 용기도, 인문학이 뭐냐며 퇴근길에 도서관의 무료 강좌를 찾아가는 육십 대의 발걸음도 투쟁이다.

공짜 자전거를 주겠다는 유혹을 거절하며 신문 구독을 끊는 것도 내겐 투쟁이었고, 감옥에서 쉽사리 풀려 나오는 사람이 경영하는 대기업의 제품을 일부러 사지 않는 곳도, 대형 마트보다는 골목의 구멍가게에서 장을 보는 것도, 차를 팔고 낑낑대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느라 핸드백을 버리고 배낭을 선택한 것도 나에겐 투쟁이었다. 관객 없는 진지한 영화에, 주목받은 적 없는 먼지 쌓인 서적에, 텔레비전에 얼굴 비칠 일 없는 가수의 앨범에, 진지한 고전보다 천박하고 조야하고 거침없는 새 문화에, 잘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마음으로 투자를 하고자 지갑을 여는 것도 내겐 투쟁이었다.

빨리 걷는 출근길 인파 속에서 슬리퍼를 찍찍 끌며 걷는 걸음도 투쟁이고, 남들이 땅 보는 법을 공부할 때 하늘의 별자리 보는 법을 공부하는 것도 투쟁이고, 모두가 식도락을 즐길 때 소박한 풀밭 밥상에 만족하는 것도 투쟁이고, 금전출납부를 쓸 시간에 음악을 듣는 것도 투쟁이고, 궁리를 할 시간에 몽상을 하는 것도 투쟁이고, 판단을 할 시간에 사색을 하는 것도 투쟁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봄날에 내렸던 어이없는 폭설도 극렬한 투쟁임을, 아스팔트의 균열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풀도 투쟁하는 중임을, 엉뚱한 행동, 기괴한 상상력, 불편한 공간, 까칠한 성격 등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우울하고 슬프며, 서럽고 괴로워 흐물대는 우리의 실상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이 기괴한 모습을 지닌 텍스트, 이 우울한 모습으로 무장된 사람을 극구 옹호하는 것도 우리에겐 투쟁의 일부다. 여기엔 싸우고 이겨서 쟁취해 낼 거란 의지 따위는 없다. 낙오를 각오한다는 의지 또한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천성과 이렇게 해야만 내가 조금은 행복해진다는 진심이 있을 뿐이다. 내팽개쳐진, 인간의 천성과 인간의 진심을 사모하기 위해 삶을 낭비해도 괜찮다는, 투쟁이 있을 뿐이다.

간밤에 '중히 여기어 아끼는 마음'을 애써 표현하려 허우적거렸던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려 했지만 도무지 자신의 사랑이 분열 속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다 하자. 사전에는 적혀 있지 않은 온갖 지저분한 감정이 밤새 마음을 갉아먹었다고 치자. 감정의 실핏줄 같은 균열 하나도 깊디깊은 낭떠러지 같았다고 하자. 그래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죽을 만큼이나 두려웠다고 하자. 그리하여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를 향해 화를 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허우적거렸고, 분열했고, 두려웠고, 그래서 울었던 한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은 밤새 자기 자신과 투쟁했고, 그리고 그게 다였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정말 그대로였을까. 어쩌면 살 냄새, 땀 냄새, 눈물 냄새를 풍기며, 이전에 있던 자리와는 다른 곳을 향해 환형동물처럼 조금씩 이동을 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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