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코로나 추석

샌. 2020. 10. 2. 11:46

코로나로 이번 추석은 고향에서 모이지 않고 각자 지내기로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추석 차례를 주관하며 지낸 게 40년이 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누구도 하지 못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걸 보니 코로나가 대단하기는 하다.

 

할 일이 없어진 추석날은 길 걷기에 나섰다. 문득 난설헌이 생각났고, 그곳을 목표 지점으로 정했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난설헌 묘가 있다. 전날은 감정 낭비가 심했는데 황폐해진 속도 달랠 겸 느릿느릿 산천경개를 구경하며 걸어갔다.

 

난설헌과 두 자식의 묘를 내려다보며 오래 앉아 있었다. 난설헌의 가련한 생애가 떠올라 마음이 착잡했다. 자동차들의 굉음이 이어지던 중부고속도로는 얼마 되지 않아 상행선부터 정체가 시작됐다.

 

 

묘 옆에 있는 시비(詩碑)에는 난설헌 시 두 편이 새겨져 있다. 두 자식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곡자(哭子)'와, 꿈에 본 신선의 땅을 그린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다. 둘 다 애절하긴 마찬가지인데, 뒷 시는 이러하다.

 

碧海浸瓊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푸른 바다 물결은 구슬 바다 물결에 젖어가고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일곱에 시들어가고

붉게 떨어진 꽃 달밤에 찬서리 맞네

 

신선세계와 현실의 대비가 극명하다. 해설을 보니 이 시는 스물세 살 때 썼다고 한다. 척박한 현실이 난설헌을 신선세계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았는지 모른다. 또한 4년 뒤에 죽을 운명을 이미 자각하고 있었는 듯하다.

 

 

 

 

지월리 동네에 핀 코스모스와 나팔꽃.

 

 

 

걷다가는 경안천변에 앉아 물멍을 하기도 했다. 너무 어슬렁거렸는가, 난설헌 묘를 다녀오는 데 다섯 시간이 걸렸다.

 

그저 덤덤하게 살 일이다. 짜증은 내어서 무엇 하고, 성화는 부려서 무엇 하겠는가. 어느 노랫말처럼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아니던가.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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