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전이었다. '양자인문학'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친구의 소개로 B 선생의 블로그를 찾게 되었다. 양자론은 물리를 공부한 나도 몇 문장 쓰기 어려운데 하물며 인문학을 전공한 분이라니, 라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블로그에서 만나게 된 B 선생은 다방면으로 박식하고 영민한 분이었다. 그분 블로그에는 종교, 철학, 예술, 여행, 과학 등에서 수준 높은 글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B 선생은 암 투병중이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양자인문학' 등 다양한 글을 쉼 없이 쓰는 게 인상적이었다. 물론 암 투병 과정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다. 힘든 과정에서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인생을 긍정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B 선생은 항암치료를 '살래의 길'이라고 명명하며 생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나는 연민과 따스한 시선으로 그분을 응원했다.
약 두 달 전쯤에 5차 항암치료를 받으러 들어간다는 글을 끝으로 블로그에 더 이상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 기간이 자꾸 길어지자 예감이 이상했다. 직전까지 새 책을 낼 준비를 하던 분이었는데 글을 쓰지 못할 상황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다른 경로를 통해 B 선생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의 글에서는 죽음을 전혀 예견할 수 없어서 설마, 했는데 사실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어느 정도 알아챈다고 한다. 수행을 깊이 한 고승은 자신이 죽을 날짜를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끼면 인간의 사고나 행동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글을 통해서 만나는 B 선생은 아예 죽음을 무시하는 듯 했다. 자신이 죽을 리가 없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보였다. 아마 정신력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게 아닐까.
의사의 말을 들어보면 말기 암환자라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도 자기는 천년만년 살 듯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죽음에 임박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인 한 분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면회 갔을 때 퇴원하고 나가서 무슨 일을 할지 설명하느라 들떠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해도 저렇듯 희망을 품고 있다고 옆에 계신 분은 한숨을 쉬었다. 인간은 죽음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인가 보다.
B 선생은 블로그의 글을 통해 만났을 뿐 전혀 모르는 사이다. 그런데도 선생의 부음을 접했을 때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이제 선생의 블로그 사이트도 내 즐겨찾기에서 지워야겠다. 방사능 원자가 붕괴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느 원자가 붕괴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우연과 확률의 영역이다. 죽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멀쩡하게 건강하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B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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