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

샌. 2021. 7. 25. 13:57

며칠 전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이다.

이런 서울대가 부끄럽다 / 송현숙 논설위원

모멸감.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스러운 느낌. 지난달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이후 벌어지는 일들을 쫓는 내내 떼어낼 수 없었던 감정은 이 세 글자였다. 어제까지 일하던 직원의 죽음을 한사코 모른 체하려는 그 조직의 모습에, 고인이 생전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난달 26일 아침, 남편과 함께 출근했던 59세 서울대 청소노동자는 퇴근하지 못했다. 막내딸과의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동료들은 당시 힘들고 멍한 고인의 얼굴을 기억했다. 평소 별다른 지병 없이 건강했던 그는 관악학생생활관(서울대 925동·기숙사) 청소노동자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건 사망 열흘 만이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유족들이 시민들 앞에 섰다. 지난 7일 기자회견, 민주노총과 함께였다. 그제서야 서울대가 조용히 묻어두려 했던 죽음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강도 업무와 직장 내 괴롭힘의 정황들이 알려진 것도 이 자리였다. 고인이 담당했던 건물은 학생 수가 많아 노동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데다 코로나19 이후 쓰레기의 양도 급증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 건물의 대형 100ℓ 쓰레기봉투들, 음식물쓰레기를 혼자서 계속 날라야 했다. 힘들다고 관리자에게 호소했지만, “늘 억울하시겠네요^^”라는 조롱에 가까운 문자만 돌아왔다. 지난달 새 안전관리팀장이 온 후엔 건물 이름을 영어나 한자로 쓰게 하는 시험, 회의 때 정장 ‘드레스코드’로 스트레스까지 더해졌다는 동료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청소노동자들을 심층 연구한 김영 부산대 교수(사회학)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사인인 급성심근경색이 대표적인 과로사 질병인 데다 마스크를 쓴 채 무거운 쓰레기를 들고 움직인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며 “과로사로 보인다”고 했다.

정작 놀라운 부분은 기자회견 이후 서울대 일부 구성원들의 반응이었다. 최근 보직 사표가 수리된 구민교 전 학생처장은 지난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산 사람들이 너도나도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게 역겹다”는 글을 올렸다. “유족 모두 순수하고 겸손한 분들이다. 그런데 노조가 개입하면서 일이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다”고도 했다. 다음날엔 관악학생생활관 관계자가 홈페이지에 민주노총 일반노조가 안타까운 사건을 악용해 유족과 직원들을 부추겨 사실관계를 왜곡했고, 언론의 편파보도로 서울대 전체 명예를 훼손했다는 취지의 공지사항을 올렸다.

누가 누구의 부추김에 넘어갔다는 말인가. 고인은 민주노총 산하 노조의 조합원이었다. 민주노총이 ‘외부세력’도 아니지만, 소위 외부세력의 도움 없이 누가 이 억울하고 ‘하찮은’ 죽음에 관심을 가져줬을까. 노조는 노동자를 지키려는 존재이유에 충실했다. 외부세력 운운하며 죽음에 입 다물게 한 ‘내부세력’들의 오만한 해명이 되레 공감능력의 바닥을 드러냈고, 사회적 공분을 더했다. 비판이 커지자 오세정 총장은 유감을 표하고 산재 신청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족들에게 대학 측 연락은 온 게 없다고 한다.

‘내부세력’들의 발언을 보며 자연스레 2년 전 겨울, 서울대 시설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도서관 난방이 꺼졌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논란의 정점은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던 교수의 ‘도서관 난방 중단… 응급실 폐쇄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언론 기고문이었다. 글의 속내는 한마디로 ‘어디 노동자가 감히,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서울대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하느냐’였다. 무엇이 이런 주장을 이리 당당하게 하도록 만들었을까.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인의 남편은 “대학 측은 (인격이 아닌) 직업이라는 껍데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미화를 하는 사람은 천박한가. 왜 그렇게 우리 가족들을 모욕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울분을 쏟았다. 고인의 가족은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포기하고, 평소 소신대로 해외에서 직업교육 등 봉사활동을 하다 몇 년 전 귀국했다. 이런 부모를 자녀들은 자랑스러워했다.

서울대와 노조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지엽적인 문제를 놓고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핵심은 서울대가 사용자인 무기계약직 직원이 근무 중 일터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서울대는 그 죽음에 함께 가슴 아파하고 개선책을 찾으려는 노력 대신, 모르쇠로 일관하며 도의적인 책임마저 피하려 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국내 최고 지성들이 모였다는 서울대의 수준인가.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교훈 속 서울대가 좇는 진리는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 참으로 부끄럽다.


30년 쯤 전 독일에 교사 연수를 갔을 때다. 대학을 방문하게 되면 그곳 교수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가 생긴다. 그때 의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와 우리 일행을 놀라게 했다. 교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버스 기사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버스 기사는 독일 사람도 아니고 폴란드인가 어디 동유럽에서 온 사람이었다. 식사 후에는 서로 담소를 나누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교수와 버스 기사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독일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중 하나였다.

이 칼럼을 읽으며 그때 독일이 떠올라 슬펐다. 독일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멀었다. 사망 전후의 사정을 들어보면 더욱 화가 난다. 학교 직원인 청소노동자의 죽음을 진심으로 가슴 아파한다면 할 수 없는 언행들이다. 진상을 알아보려고 방문한 민주당 의원들에게 학생들이 기숙사에 들어오지 말라고 막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칼럼의 제목대로 정말 '이런 서울대가 부끄럽다'.

서울대가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대학으로 인식된 지는 꽤 됐다. 있는 집 자식이 아니면 일류 대학에 입학하기 어렵다. 교육이 기득권층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엘리트 의식에 젖은 교수와 학생들이 사회의 불공정에 눈을 돌리기 쉽지 않으니 악순환이 반복한다. 우리는 이미 계급 사회, 신분 사회로 진입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 정의를 위한 개혁이 절실한 이유다.

교수와 청소노동자는 맡은 일이 다를 뿐 귀천이 있을 수 없다. 교수가 존중받는다면 청소노동자도 마찬가지다. 돈이 있든 없든, 직업이 무엇이든, 누구나 존엄한 한 인간으로 대접받는 세상은 언제쯤 찾아올까. 30년 전 독일에서 느낀 감탄과 부러움이 지금 독일을 찾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인권과 평등이라는 관점에서는 우리 사회가 몇 발자국 전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독일에 가서 느꼈던 열등감은 도대체 몇 세대가 지나야 씻어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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