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많은 군중이 다시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군중이 측은합니다.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굶주린 채 집으로 헤쳐보냈다가는 길에서 기진해 버리겠습니다. 더구나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했다.
"여기는 외딴 곳인데 어디서 빵을 구해다가 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대들은 빵이 몇 개나 있습니까?"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군중에게 명하여 땅바닥에 자리잡게 하시고, 빵 일곱 개를 들어 사례하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며 나누어 주게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작은 물고기도 몇 마리 있었는데, 예수께서 역시 축복하신 다음 나누어 주게 하셨다. 배불리들 먹었고, 빵조각 남은 것을 모으니 일곱 바구니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쯤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헤쳐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 마르코 8,1-10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비슷하다. 어쩌면 같은 상황을 마르코는 약간 다른 버전으로 적었는지 모른다. 한 사건이든 두 사건이든 마르코가 이 이야기를 중시한 것만은 확실하다. 마르코는 어떤 의도로 비슷한 두 이야기를 기록하게 되었을까?
BC 13세기경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지도 아래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한다. 건조한 사막 지대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양식이 떨어져 아사할 위기에 처한다. 이때 하늘에서 '만나'라는 빵이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주었다. '만나'는 딱 하루치만 내렸는데, 백성들은 수십 년 동안 이 양식을 먹으며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빵을 축복하며 나누어주는 예수에게서 유대인이라면 '만나'를 연상했을 테고, 예수한테서는 모세라든가 아니면 하늘의 신성을 가진 분/하느님의 아들로 우러렀을 것이다. 마르코가 전하려는 의도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마르코는 예수가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이렇듯 우회적으로 나타낸다. 반복적인 변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결론을 맺는다.
"군중이 측은합니다." 이 말씀에 예수의 삶을 관통하는 정신이 들어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고, 불의에 눈 감지 않고, 억압받는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밑바탕은 바로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었다. 예수는 고통받는 이웃을 보면 내면에서 측은지심이 샘솟듯 솟아나온 것 같다. 에수의 모든 기적은 이런 간절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그 당시 예수가 품고 있었던 마음의 일단이나마 유추해 본다.